[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59>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5월 16일 18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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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그렇다면 그게 대왕께서 육국의 후손들을 다시 왕으로 세울 수 없는 두 번째 이유가 됩니다. 아직 천하 만민의 마음을 두루 어루만지지 못했으면서 제후를 왕으로 봉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장량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세 번째의 젓가락을 뽑아들었다.

“주나라 무왕은 거교(鉅橋=은나라의 큰 창고가 있던 곳)의 곡식을 풀어 굶주린 백성들을 먹였고, 녹대(鹿臺=紂王이 꾸몄다는 사치스런 동산)의 돈을 흩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도 천하 모든 창고의 돈과 곡식을 꺼내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나눠 주실 수 있습니까?”

“그도 어려울 것이오. 과인은 아직 천하의 창고를 다 얻지 못했소.”

“그게 세 번째 이유입니다. 천하의 돈과 곡식을 풀어 어려운 백성들을 보살펴 줄 수도 없으면서 육국의 후손을 왕으로 되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장량이 그렇게 말하고 다시 네 번째 젓가락을 빼들었다.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를 쳐 무도한 주왕을 내쫓는 일이 끝나자 싸움수레를 사람이 일상 타고 다니는 수레로 바꾸게 하고(偃革爲軒), 창칼에 호랑이 가죽을 씌워 거꾸로 매닮으로써 다시는 그걸 쓰지 않겠다는 뜻을 천하에 널리 알렸습니다. 또 무왕은 싸울 때 타던 말을 화산(華山) 남쪽에 풀어 쉬게 함으로써 다시 타지 않을 뜻을 밝혔으며, 군량 나르던 수레를 끌던 소를 도림(桃林) 북쪽에 놓아주며 다시 싸움에 부리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도 무력(武力)을 버리고 문교(文敎)를 행하시며 다시는 군사를 움직이지 않겠다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직 천하 형세를 결정짓는 싸움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어찌 그리할 수 있겠소?”

“그렇다면 제후를 왕으로 봉할 수 없으니, 이게 대왕께서 육국의 후손들을 왕으로 봉할 수 없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장량이 그래놓고 다섯 번째 젓가락을 뽑아들며 말했다.

“지금 천하의 뛰어난 호걸(游士)들이 부모처자와 헤어지고 조상의 묘소와 오래된 벗들을 떠나 분주히 대왕을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이 밤낮없이 바라는 것은 뒷날 대왕께서 천하를 얻으셨을 때 한 뙈기의 땅이라도 떼어 제후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대왕께서 육국의 후손들을 다시 왕으로 세우면 그들에게 떼어줄 땅은 한 뼘도 남지 않게 되고 맙니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 대왕을 버리고 옛 주인을 찾아가 섬길 것이며, 부모처자와 옛 벗들과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버릴 것입니다. 그리 되면 대왕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천하를 차지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것이 대왕께서 육국의 후손을 다시 왕으로 봉해서는 안 되는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거기서 잠시 숨을 돌린 장량은 마지막 젓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오직 초나라가 강성할 수 없게 만드는 길만 보고 계시지만, 반드시 모든 일이 대왕의 뜻과 같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초나라가 강성해지면 대왕께서 세운 육국의 후손들은 다시 스스로를 굽혀 초나라를 따를 것이니, 그때는 그들을 어떻게 신하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들을 다시 왕으로 봉해서는 안 되는 여섯 번째 이유가 됩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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