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조헌주]가토 기요마사와 라이벌

  • 입력 2005년 4월 18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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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본 도쿄(東京) 시내에서 ‘세이쇼코(淸正公) 앞’ 교차로 부근으로 이사했다. 바로 곁에 절이 하나 있는데 행인들이 길에 멈춰 서서 경내를 향해 합장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이웃 일본인에게 물었더니 ‘기도발’이 잘 받는 유명한 곳이란다.

이 절이 받드는 ‘세이쇼’공(公)이란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군을 지휘한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다. 400여 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그는 일본인들에게 신통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13세 때 동향 출신의 무장 도요토미의 부하가 된 가토는 국내 통일전쟁 과정에서 무용을 떨쳤다. 30만 침략군의 양대 지휘관 중 한 명인 그는 조선 산하를 짓뭉개며 관군 양민 가릴 것 없이 주살했다. 임해군 등 왕자 2명을 사로잡기도 했다.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정권의 사령관 가토를 일본인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것 또한 침략전쟁 미화요 역사왜곡이 아닌가. 임진왜란 직후 국제전범 법정이 열렸다면 태평양전쟁 때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처럼 가토 또한 전범으로 처형되었을지 모른다.

이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의 역사관이 다른 것은 최근 100여 년의 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 왜곡’이라고 할 때 임진왜란 당시의 일이 쉬 떠올려지지 않는 걸 보면 역시 ‘세월이 약’인 측면이 있다.

가토와 라이벌 관계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떠올려 본다. 그는 무인이었지만 당시 일본 최대의 국제무역지대인 오사카(大阪) 출신답게 협상과 설득을 중시했다.

임진왜란 때 부산에 먼저 상륙한 1군 선봉장은 고니시였고, 닷새 뒤 상륙한 2군 우두머리가 가토. 한양 입성을 놓고 다투던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한강 남쪽에 도달한다. 한발 앞서 서울에 들어온 고니시 군은 도강을 끝내고 배를 없애 버려 가토 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고니시는 평양에 머물며 휴전을 주장했으나 가토는 명나라까지 칠 것을 주장했다. 화전론(和戰論) 대결에서 가토는 일단 패배해 귀국 조치되기도 한다.

스타일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한 도요토미의 용인술이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이런 방책이 그의 사후에는 통하지 않았다. 후계체제 문제로 둘은 극단으로 갈린다. 고니시 등 도요토미가(家)를 지지하는 세력은 가토 등이 지원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편과 충돌해 패배했고 체포된 고니시는 처형됐다.

13세 때부터 도요토미가에 충성해 온 가토가 도쿠가와 편을 든 이유는 수수께끼다. 향후 정국을 정확히 읽었다기보다 고니시가 도요토미 집안 편에 서 있었기에 라이벌 의식이 발동해 그랬을 것이라는 해석도 많다. 승자의 잔치판에 낀 가토는 규슈 일대의 영주로 잘나가는 듯했으나 아들 대에 영지를 몰수당하고 대마저 끊기고 말았다.

요즘 한중일 세 나라의 갈등의 이면에도 라이벌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그런 의식이 죽기살기식 라이벌이 아니라 선의의 경쟁을 위한 생산적 진통이기를 기대해 본다. 그게 역사의 교훈이 아닌가.

조헌주 도쿄 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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