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예종석/지금은 파업할 때가 아니다

  • 입력 2003년 6월 17일 18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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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만은 안 된다. 정부의 일괄매각 방침에 반대하는 조흥은행 노동조합의 총파업 예고는 결코 실행에 옮겨져서는 안 된다. 조흥은행의 허흥진 노조위원장은 “이번 총파업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극렬할 것”이라며 “총파업시 은행전산망도 완전 다운시키겠다”고 했다. 그는 여기에 친절하게도 “은행전산망은 공동망이기 때문에 2, 3일 내에 전 은행의 전산망이 올 스톱될 것”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조흥은행 노조가 파업을 강행하면 1000만명에 이르는 개인고객과 8000여 법인고객의 거래가 혼란에 빠질 것은 자명하다.

▼조흥은행事態 ‘신인도’ 먹구름 ▼

또한 “조흥은행 매각 건이 한국 정부의 향후 경제 정책을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시험지가 될 것”이라며 지켜보고 있는 외국인 투자자들은 총파업이 강행될 경우 한국 경제에 등을 돌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가. 조흥은행은 외환위기 과정에서 공적자금 2조7000억원이 투입돼 살아남은 은행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공적자금의 회수를 위해 정부가 지분을 매각하겠다는데 노조가 이렇게 극단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명분 없는 일이다. 물론 정부의 일괄매각 논리에 대응하는 노조의 독자생존이나 분할매각 논리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측은 그동안 대화를 할 만큼 했다. 이제 결론을 내야 할 시점에 이르러 전체 지분의 80%를 갖고 있는 정부가 결정의 주도권을 쥐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정부의 지분 매각은 노사협상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안이다.

노조측은 파업 명분으로 여러 가지를 내세우고 있으나 그 본질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보인다. 은행 합병으로 야기될 구조조정 과정에서 혹 불이익을 당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것이다. 그러나 일신상의 불안감 때문에 국민의 은행임을 자임하는 은행의 구성원들이 국민을 더 큰 불안 속으로 몰아넣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다. 또한 이 문제는 아직 협상의 여지를 남겨놓은 사안이기도 하다.

정부도 이번 사태의 원인제공을 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우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노조 간부들을 만나 “독자생존 능력을 검토한 뒤 매각 여부를 다시 판단하자”고 한 약속이 노조가 “대통령이 독자생존 약속을 어겼다”며 강경투쟁으로 가는 데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2일에도 청와대는 노정(勞政) 토론회를 열어 노조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그때에서야 개입중지를 선언한 바 있다.

중차대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과 측근들이 현장에 뛰어드는 충정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절차와 원칙이 있다. 주무 부서를 젖혀두고 대통령이나 청와대 비서진이 개입하면 일을 해결하기보다는 그르치기 쉽고, 나아가 나쁜 선례만 남기게 된다. 지난번 대통령-평검사의 대화 이후 대통령과 직접 담판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요구가 사회 곳곳에서 일고 있다. 조흥은행 노조도 은행장에게 제출해야 마땅할 집단사표를 청와대에 제출하겠다고 승강이를 벌인 바 있다. 이남순 한국노총 위원장은 “정부요청이 있다면 대통령과도 만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제 노총 위원장에게 노동부 장관쯤은 안중에도 없는 직위가 되었고, 대화의 대상은 더욱 아니게 된 것이다. 하긴 산하단체의 장인 금융노조위원장이나 조흥은행 노조위원장도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 타협한 바 있으니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요구인지도 모르겠다. 대통령의 권위가 이렇게 땅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불필요한 권위주의는 사라져야 하겠지만 국가 지도자로서의 권위는 지켜야 한다. 그래야만 나라의 영(令)이 선다.

▼흔들리는 ‘법과 원칙’ 문제만 키워 ▼

이제 노무현 정부도 수습기간은 마친 셈이다. 지금쯤은 국정운영에 확고한 원칙이 서야 할 때다. 이번 파업에 대한 정부의 대처방식은 참여정부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다. 정부는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선언한 것처럼 ‘법과 원칙’에 따라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 또다시 정치적 논리에 의해 정부의 의지가 꺾인다면 한국 경제에 미래는 없다.

지금은 파업을 할 때가 아니다.

예종석 한양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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