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황주리 '안경에 관한 명상' 展

  • 입력 2003년 6월 3일 18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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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스냅사진을 찍듯 안경알에 도시의 일상을 그려 넣은 ‘안경에 관한 명상’전 중 일부. 황주리씨가 캔버스로 사용한 안경알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과 사물들은 관계 맺기와 단절, 절정과 권태를 반복하는 우리정신의 풍경화다. 사진제공 황주리씨
카메라 스냅사진을 찍듯 안경알에 도시의 일상을 그려 넣은 ‘안경에 관한 명상’전 중 일부. 황주리씨가 캔버스로 사용한 안경알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과 사물들은 관계 맺기와 단절, 절정과 권태를 반복하는 우리정신의 풍경화다. 사진제공 황주리씨

화려한 색채로 도시인들의 내면 풍경을 자유롭게 표현해 80년대 단연 주목받는 화가로 떠올랐던 황주리(46). 그가 이번에는 안경 알에 카메라 스냅사진을 찍듯 도시의 일상을 그려 넣은 ‘안경에 관한 명상’이라는 이색적인 전시회를 연다. 전시를 앞두고 서울 구파발역 근처 화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는 말을 아꼈고 속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때로, 신들린 듯한 표현 뒤에 늘 이성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느낌 그대로였다. 아니, 어쩌면, 스무살 후반이라는 나이에 인기 작가로 부상해 20여년이 넘는 오랜 시간동안 대중에 단련된 사람이 갖고 있는 노련함일 지도 몰랐다. 한참 후 뜻밖의 말을 했다.

“난 인기작가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이다. 저 사람은 ‘인기 작가니까’ 하는 카테고리로 묶여 애정을 갖고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웃음) 한마디로 ‘왕따’였던 때가 많았다.”

그는 일찍이 타고난 화재(畵才)로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약관의 나이에 20여회 개인전을 열었고 작품을 팔아 생활할 수 있었던 한국의 몇 안되는 전업작가로 꼽혔다. 그런 그가 지난 시절의 고독과 외로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는 말끝에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이라는 토를 다는 버릇이 있었다. 외로운 사람 특유의 자기방어 심리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대화가 지속될수록 그것은 ‘다른 것’, ‘아닌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여유와 포용임을 깨달았다. 이제 그도 나이가 드는 것일까.

그는 “나이? 물리적인 계산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고 말했지만 곧 이어 “다만, 요즘엔 옛날보다 (남과) 어울려 산다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라 우정과 애정으로 흘러가는 공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작가들이 다른 사람 전시 오프닝에 얼굴 내미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요즘 그는 고독한 전시 오프닝을 애써 찾아다닌다고 했다.

자화상 91×73㎝, 2000.

이런 변화는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디테일한 감정 표현들이 옛날보다 자연스러워진 것 같다. 사실, 옛날엔 의도적인 작업이 많았다. 분노든, 저항이든, 사랑이든, 지루함이든. 하지만, 지금은, 생각으로부터 손이 자유로워졌다.”

그러고보니, 이번 전시작들에는 맘가는 대로, 붓가는 대로, 색가는 대로 손을 내버려 둔 유희가 주는 즐거움이 제일 먼저 다가온다.

그가 여전히 천착하는 주제는 우리 정신의 풍경화다. 캔버스로 쓰인 안경알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은 관계 맺기와 단절, 절정과 권태를 반복하는 우리의 모습이고 꽃, 카메라, 의자, 버스정류장, 컴퓨터 마우스, 시계, 컵 등 온갖 사물들은 절망과 한숨과 웃음과 눈물을 지닌 하나하나의 생명체들이다.

그는 “1991년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놓인 ‘죽은 자들의 거대한 안경 무덤’을 보고 이제까지 보았던 어떤 미술 작품보다 슬픈 흔적을 지닌 설치 작업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처음에는 안경을 죽은 자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작업을 했는데 차츰, 본질적인 고민에 닿았다”고 소개했다. 그것은 ‘차이’와 ‘다름’에 대한 자각이었다.

“다른 사람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듯 안경은 인간의 지극히 개인적인 흔적이다. 결국 내가 세상을 보는 렌즈가 있는 것처럼 남도 나와 다른 렌즈가 있는 것이다.”

되도록 오래 살아 더 많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그녀는 일주일에 한번 외출하는 일 말고는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한다고 했다. ‘죽는 날까지 화가로 남고 싶다’는, 이 작가 의 미래는 그녀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만들어 가야할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28일 서울 관훈동 노화랑. 02-732-3558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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