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김정일 영결식… 평양 ‘통곡의 100만 물결’ 비밀은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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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가 겪은 ‘김일성 영결식’

평양은 29일 또 한번 전 세계의 주목을 끌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영결식에 평양 시민들이 일제히 연도로 나와 ‘거대한 통곡의 물결’을 연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가 김일성종합대 재학 시절이던 1994년 7월 19일 김일성 주석의 영결식을 되돌아봤다.

그날은 오전 2시경 눈을 떴다. 모임 장소에 4시까지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온몸이 납처럼 무겁기 그지없었다. 무려 열이틀간의 애도기간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각종 행사에 시달려 왔고 전날 밤에도 10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그래도 오늘만 견디면 끝인지라 마지막 힘을 짜냈다. 입맛이 없어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행렬이 흐르고 있다. 그 시간 평양 시민 전체가 거리에 나선 것이다. 웃음도, 이야기도, 소란도 없었다. 그저 그림자의 흐름뿐…. 영결차가 지나갈 메인 거리의 약 200m 바깥쪽엔 벌써 보안원(경찰)과 국가안전보위부원들이 쭉 늘어서 안쪽으로 개미 한 마리 접근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한 시간 넘게 뒷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모임장소에 도착했다. 버스가 다니지 않아 집이 먼 사람은 2, 3시간씩 걸어오기도 했다. 오전 4시가 좀 넘자 조직 책임자가 출석을 불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늘 같은 날 설마 빠지는 사람이 있을라고.’

5시부터 ‘행사장(연도)’ 입장이 시작됐다. 보위부원이 명단을 들고 이름을 불러 시민증 사진과 얼굴을 비교한 뒤 바리게이트 사이를 한 명씩 통과시킨다. 시민증을 분실한 사람은 전날 임시신분증을 발급받았다. 이것조차 없으면 통과할 수 없다.

▶ (영상) 휘황찬란 김일성-김정일 묘, 北식량 3년치 들여

바리게이트 양옆에서 날카로운 눈길들이 몸 아래위를 더듬었다. 가방 등 일체의 소지품을 갖고 오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주머니가 불룩하면 소지품을 꺼내 행사가 끝난 뒤 찾아가도록 했다.

평양 시내 곳곳에서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이렇게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듯 한 명씩 거리로 나갔다. 그래도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몸에 밴 ‘1호 행사(김일성 김정일 등장 행사)’ 참가 절차였다. 수령에게 삶과 죽음의 차이는 없었다. 하긴 ‘영생’이라 하지 않았던가.

▼ 영결식 참석자 전원 몸수색… 아무도 불평안해 ▼

두 시간여가 지난 뒤 거리 양쪽에 사람들이 가득 찼다. 이들이 자발적으로 무작정 연도로 나가는 게 아니다. 이런 행사 때에는 바로 자기 집 앞에도 나갈 수 없다. 위에서 조직별 인원수를 따져 정교하게 구간을 맡겨주고 모든 시민은 몇 시간 걸어서라도 반드시 자기 구역에 가야 한다.

영결식은 오전 10시에 열리지만 8시쯤 평양은 모든 준비가 끝났다. 거리에 나오면 영결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영구차는 어디를 지나는지 알 수 없다. 그냥 기다릴 뿐이다. 정오경이 되자 한 간부가 뛰어오며 소리쳤다.

“곧 영구차가 도착합니다. 자 똑바로 줄을 맞추시오.”

앉아 있거나 묵묵히 서있던 사람들이 부산해졌다. 약 10분 뒤 저 멀리부터 통곡소리가 일어나더니 점점 가까워 왔다. 곧이어 영정을 앞세운 영구차가 눈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시속 약 30km의 속도로 1분도 안돼 우리 앞을 지나갔다. 무덤덤해졌던 감정을 슬픔으로 끌어올릴 사이도 없이 새벽부터 기다린 영결식은 그렇게 순식간에 끝났다.

맨 앞줄에 서있던 교수들은 그 짧은 시간에 땅을 치며 통곡을 시작했다. 담임교수가 두 팔을 높이 들고 “수령님” 하고 목청껏 소리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졸업할 때까지 그 교수만 보면 그 장면이 떠올랐다. 나이 든 교수일수록 더 슬퍼했다.

영구차가 지나간 뒤 수령의 마지막을 떠나보내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내가 갑자기 의식돼 주변을 슬그머니 둘러보았다. 그러곤 놀랐다. 몇몇 여학생을 빼고는 젊은 대학생들은 나처럼 울지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김일성대 학생인데….

한국에 온 뒤 당시 평양 시민들의 눈물을 두고 일부 언론이 ‘집단 히스테리’라든가, 보위부의 처벌을 의식한 ‘거짓 눈물’이라고 평가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현장에 있었던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영구차가 지나가는 그 순간만큼은 히스테리도, 보위부의 감시도 없었다. 적어도 그 순간 통곡한 평양 시민들은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를 보냈다. 내가 현장에서 본 것은 그것이었다.

29일에도 북한 TV는 통곡의 현장을 방영할 것이다. 하지만 현장 분위기는 1994년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눈물에 담긴 생각도 정말 다양할 것이다. 정말 슬프든가, 살아온 과거가 서럽다든가, 미래가 불안하든가, 분위기에 휩쓸리든가, 눈치가 보이든가….

어떤 눈물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수십년 신정(神政)체제의 종말에 마지막 눈물 정도야 바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제 김정은에게 눈물이 바쳐질 일은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1994년 나는 영구차를 지나보내며 “한 시대가 이렇게 눈앞에서 지나가는구나”하고 생각했다. 당시로선 불과 1년 뒤 ‘고난의 행군’으로 시체들이 산야에 뒹굴 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나는 서울에서 북한의 또 한 시대가 지나감을 목도하게 됐다. 눈물 흘리는 북한 주민들을 보면서 저들은 부디 지금보다 더 무서운 내일을 맞지 않게 되기를 기도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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