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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공화는 세계의 대세”… 계층 초월한 외침에 日헌병 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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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공화는 세계의 대세”… 계층 초월한 외침에 日헌병 굴복

안영배 논설위원 입력 2019-08-03 03:00수정 2019-08-0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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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67화> 황해 수안
황해도 수안군의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른 천도교계 독립운동가들. 안봉하 이영철 김영만 나찬홍 강국보(왼쪽 사진부터) 등 지사들은 일제 헌병분대에 몰려가 “조선이 독립됐으니 헌병대를 이양하라”고 요구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20년 7월 22일 오전 8시 40분경 서울 정동의 경성지방법원 특별법정. 불과 며칠 전 3·1운동 민족대표 48인에 대한 공판이 열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법정에서 불빛에 번득이는 금테 안경을 두른 일본인 검사가 심리를 시작했다.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치안을 방해하고 피고 이영철, 홍석정 등은 번갈아가며 (수안 헌병분대) 분대원에 대해 다수(多數)한 위력을 빌려 ‘우리들은 이미 조선독립의 선언을 하였으니 속히 이 분대를 내놓고 나가라. 만일 듣지 않으면 계속하여 다방(多方)으로부터 몰려오는 천도교도가 더욱 증가하여 어떻게든지 이 요구를 하리라’ 협박하고….”(동아일보 1920년 7월 23일자 3면)

이날 재판에선 북한의 황해도 수안군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잡힌 7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공소심리가 진행됐다. 당시 재판을 참관한 동아일보 기자는 “세상의 주목을 끌지 아니한 까닭인지 방청석에는 겨우 20여 명의 방청자가 있는데, 그중에 수삼인의 상투 있는 사람이 있음을 보건대 아마 이번 공판이 열린다는 말을 듣고 멀고먼 시골에서 일부러 방청을 하러 온 사람인 듯하다”고 재판정 상황을 소개했다. 이어 “70여 명의 피고 중에는 머리가 희득희득하게 세인 사람도 있고, 스스로의 의복을 차입할 수가 없는 까닭인지 보기도 흉한 푸른 감옥 옷을 입은 것은 새삼스럽게 감회를 끈다”고 보도했다.


1920년 당시 일제는 3·1운동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극구 막으려 했다. 신문과 잡지 등 언론에 대해서는 검열 방식으로 보도를 통제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재판정에서 진행된 일본인 검사의 공소와 심리를 낱낱이 보도하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수안 지역의 만세운동 전모를 세상에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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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에 의해 알려지게 된 수안군의 만세운동은 평안북도 의주군, 경기도 안성군과 함께 ‘3대 실력 항쟁지’로 꼽힌다. 3대 실력 항쟁지는 평화로운 시위 수준을 넘어서 유혈충돌이 벌어진 대표적인 곳들이다. 일제가 3·1운동 민족대표들에 대한 신문조서에서 3·1운동의 폭력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폭동’의 대표적인 지역들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다.

○ 자유와 공화의 시대

수안군 만세운동은 천도교인들의 주도로 진행됐다. 경성의 천도교 총부 지시에 따라 수안의 천도교구는 1919년 3월 3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고종의 장례일인 이날은 일제가 제2차 만세운동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경성 행사’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때였다.

수안군 지역의 천도교 지도자들은 거사 전날인 3월 2일 수안읍내 천도교구실에 집결해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논의했다. 이미 경성에서 도착한 독립선언서는 수안군 각 지역에 비밀리에 배포한 뒤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거사 계획이 누설됐다. 이날 오후 3시경 “독립선언서가 경성에서 수안에 전달됐다”는 황해도 경무부장의 전보를 받은 수안 헌병분대가 천도교구에 기습적으로 들이닥쳤다. 수안 천도교구장 안봉하 등은 독립선언서가 없다고 잡아떼며 저항했지만, 교구 소사실 돗자리 밑에 숨겨두었던 독립선언서가 발각됐다. 안봉하 김영만 등 11명의 천도교 교직자들이 현장에서 붙잡혔다.

다행히 일제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한청일(전교사)과 홍석정(전 천도교구장)은 이날 밤 각 지역의 중견 인물들을 다시 모은 뒤 3월 3일로 예정됐던 거사를 차질 없이 치르기로 다짐했다. 이에 따라 3월 3일 오전 6시경 140여 명의 교인들이 천도교구실에 모였다. 시간이 촉박해 참석자가 1500명가량의 수안군 천도교인 중 10%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한밤중에 수십 리 길을 걸어 모일 정도로 비장한 결의를 다진 정예 교인들이었다.(‘수안교구의 만세운동’, 신인간 1989년 3월호)

이들은 모이자마자 곧장 시위에 돌입했다. 한청일과 홍석정은 시위대 중앙에서 2개의 큰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행진했고, 이영철(천도교구실 소사)은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대를 이끌었다. 이영철은 수안금융조합사무소 앞에 도착한 뒤 “조선은 독립하였다. 자유와 공화 정치는 세계의 대세다. 속히 헌병분대를 명도(明渡)하라”고 외쳤다. 시위대는 헌병분대 앞뜰까지 진출한 뒤 다시 “대한제국은 오늘로 독립하였고 우리는 자유민이 됐다”고 외쳤다.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5권)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대 규모는 커져갔다. 고함 소리와 만세 소리로 천지가 진동했고, 사람들은 당장 독립이 된 것 같은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영철 등 지휘부는 헌병분대 사무실로 몰려가 일본인 헌병분대장에게 분대를 인도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일본 헌병과 보조원들은 벌벌 떨며 허둥대다 경성 본부에서 연락이 오는 대로 물러가겠다는 약속을 했다. 일종의 ‘항복 선언’이었다. 시위대는 승리의 환성을 올리며 천도교 교구로 돌아갔다. 수안읍내는 헌병대까지 접수했다는 소식이 퍼져나가 온통 독립만세 함성으로 뒤덮였다.(‘수안군지’)

○ 9명이 현장에서 즉사

동아일보 1920년 7월 23일자에 게재된 수안 독립만세 운동가들의 재판 장면.
오전 11시, 수안교구실에는 100여 명의 천도교인들이 모여든 가운데 시위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시위대는 헌병분대로 몰려가 재차 “분대를 명도하라”고 촉구했다. 이때 이동욱과 오관옥 등 일부 천도교인들이 헌병들을 쫓아내기 위해 사무실로 뛰어들었다. 그때까지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당황하던 헌병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사격을 시작했다. 헌병의 무차별 총격에 다수의 교인들이 쓰러지고 시위 대열은 무너졌다.

오후 1시경, 흩어졌던 시위대는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모였다. 150여 명의 천도교인들이 헌병분대로 몰려갔다. 한청일이 선두에 서서 헌병의 만행을 규탄하고, 붙잡은 이들을 석방해줄 것을 요구했다. 오관옥은 “나는 총알을 맞지 않는다”면서 가슴을 풀어헤친 채 헌병분대 사무실로 다가갔다. 시위대 역시 헌병분대가 설치한 장애물을 제거한 뒤, 독립만세 함성과 함께 “죽이라”고 절규하며 사무실로 뛰어들었다. 또다시 일본 헌병분대의 총격이 시작됐다. 한청일과 오관옥 이외에 4명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일본 헌병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폭행을 가하며 칼로 찍는 등 살육을 자행했다.

일본에서 발간된 ‘현대사자료’는 당시 수안에서 벌어진 학살 행위를 이렇게 기록했다. “헌병들의 발포에 5명이 즉사하고 또 다른 몇 명이 쓰러졌다. 한 노인이 총격을 항의하자 역시 사살했다. 그 노인의 아내가 달려와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하자 헌병은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다 사살해 버렸다. 그 다음 날 아침 노부부의 딸이 달려왔는데 이번엔 전신을 칼로 난자했다.” 황해도 장관 보고서(1919년 8월 18일자)는 이날 현장에서 즉사한 이가 9명, 중상자는 18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시위대는 분노하기 시작했다. 읍내의 관청과 일본인 주거지를 불태워버린다는 풍설까지 나돌았다. 이에 일본인들이 살상될 것을 우려한 수안 헌병분대는 민간인야경단을 만들고, 일본인 남자에게는 헌병복을 입혀 경계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등 비상조치를 취했다. 한편으로는 상급 부대에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3월 4일 평양 주둔 보병부대 20여 명이 수안에 파견됐다.(‘한국민족운동사료, 3·1운동편’)

증파된 일본 헌병들의 진압과 감시 활동으로 수많은 이들이 붙잡혔다. 하지만 수안군 만세운동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시위를 주도했던 천도교인들은 수안군 내 면소재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이어갔다. 3월 7일 수구면 석달리의 천도교 전교사 이승필 등은 40여 명의 교인을 이끌고 장날에 만세를 부르고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또 수안군의 시위 소식은 이웃한 곡산, 신계, 서흥, 재령 등 황해도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한 장소에서 벌어진 시위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구금자만 71명에 달했던 수안 만세운동은 지방에서 취급할 사안이 아니라는 일제의 판단에 따라 경성지방법원으로 송치됐다. 이후 1년 가까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최석구는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최고 2년 6개월에서 최저 금고 6개월의 형을 받았다.

이들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그 외에 대장장이, 짚신장수, 마부 등 소규모 자영업자와 일용직 노동자, 영세상인 등이 운동에 참여했다. 수안의 만세운동은 3·1운동이 계층과 계급에 구애받지 않은 거족적 민족운동이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주요 사례였다.(조규태, ‘황해도 수안지역 천도교인의 3·1운동’)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3·1운동#황해도 수안군#천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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