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가 커다란 집”… 도보로 5분 거리에 주방-서재-거실을 만들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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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복지를 넘어 공간복지로] <4> 서울 후암동 공유공간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들어선 공유 공간인 후암주방(왼쪽), 후암거실의 모습.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들어선 공유 공간인 후암주방(왼쪽), 후암거실의 모습.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25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후암주방. 10m² 남짓한 작은 공간에 가정집 주방처럼 싱크대, 전자레인지, 냉장고, 전기밥솥, 냄비, 식기 등이 마련돼 있다. 식사를 할 수 있게 4인용 식탁도 있다. 찬장에는 소금, 설탕, 참기름, 간장 등 각종 양념 재료도 가지런히 놓여 있다. 대학생 남태현 씨(26)는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주방 공간이 매우 좁다. 음식을 하면 온 집 안에 냄새가 퍼진다. 화구도 적어 요리를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커플 기념일에는 여자친구와 함께 이곳을 찾아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고 말했다.

○ ‘내밀한 공간’ 가정집의 주방을 공유하다

2017년 3월 문을 연 후암주방은 일정 사용료를 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유 주방이다. 옛 의류 수선집을 개조해 가정집 부엌을 그대로 옮겨다 놨다. 2인, 3시간을 기준으로 이용료는 7000∼1만 원. 공간을 마련한 이준형 씨(34) 등 20, 30대 건축가 6명은 “원룸, 고시원의 부엌은 좁다. 뭘 만들어 먹기 어려워 공유 부엌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신축보다는 낡은 건물을 수선해 재사용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도시공감협동조합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후암동은 일제 적산가옥부터 신축 협소주택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택이 혼재한 동네다. 일부 지역은 산기슭에 위치해 있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남산 주변 고도제한 등으로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 대부분 지하철역에서도 상당히 떨어져 있다. 시간이 멈춘 듯 개발이 더뎌 도시재생에 관심이 많은 건축가들에겐 매력적인 곳이다. 건축가 이준형 씨는 “처음 후암동을 방문했을 때 주민들이 오랫동안 어울리며 사는 ‘동네’라는 느낌이 강했다”며 “함께 어울려 사는 주거지를 모색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라고 말했다.

후암주방은 하루 두 팀만 이용할 수 있다. 한 달 평균 50∼55팀, 최소 100명 이상이 이곳을 이용한다. 이용자의 20% 정도만 동네 주민이다. 대부분 주방을 이용하려고 후암동까지 찾은 사람들이다. 크고 작은 가족, 친지, 친구 모임이나 기념일 등을 위해 공간을 빌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꿈을 키우는 공간으로도 활용한다. 요리사 유현준 씨(21)는 “후암주방을 빌려 한시적인 식당을 만들 수 있다. 음식을 만들어 주민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출시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인터넷으로 신청해 하루 동안 대관 가능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들어선 공유 공간인 후암서재의 모습. 저렴한 비용으로 이 공간들을 빌려 ‘내 집’처럼 이용할 수 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들어선 공유 공간인 후암서재의 모습. 저렴한 비용으로 이 공간들을 빌려 ‘내 집’처럼 이용할 수 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도시공감협동조합의 청년 건축가들은 주방을 시작으로 다양한 공유 공간을 늘리기 시작했다. 후암동을 커다란 집으로 보고 서재, 거실 등을 계속 만들기로 했다. 후암주방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후암서재를 열었다. 후암서재도 인터넷으로 신청해 하루 동안 빌릴 수 있는 공유공간이다. 27m² 공간에 책꽂이와 책, 5인 테이블과 1인용 소파, 싱크대, 커피메이커 등이 갖춰져 있다. 안쪽에는 바닥에 열선이 깔려 있는 작은 방도 있다. 작업을 하다 피곤하면 잠시 낮잠을 잘 수 있다. 대여료는 4인, 8시간 기준 5만 원 정도. 도시공감협동조합 소속 건축가 이기훈 씨(27)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끼면서 작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공유 사무실이나 카페 등은 타인과 섞여 일해야 하지만 후암서재는 자신이 대여한 시간 동안은 개인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올 7월 후암주방과 후암서재의 중간 지점에는 후암거실을 마련했다. 3층 건물 1, 2층에는 요리사가 상주하고 맥주 등을 파는 작은 식당을 열었다. 3층에는 스크린, 홈시어터, 소파 등을 갖춘 후암거실이 들어섰다. 각 층의 면적은 27m²가량이다. 동네 주민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둔 주민들이 부부, 자녀 동반 등으로 모임을 갖고 후암거실을 찾아 소소한 주제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생일파티가 열리기도 한다. 영화감상, 독서토론 등의 정기 모임도 열린다. 4, 5시간 이용료는 3만∼8만5000원.

○ 청년 건축가들이 구현한 ‘공간복지’

공간복지는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체육시설, 독서실, 노인정 등 생활 사회간접자본(SOC) 시설을 갖춰 주민들이 편하게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개념이다. 가정집의 내밀한 공간인 주방, 거실, 서재 등도 주민들과 공유한다면 공간복지의 개념을 충실하게 반영할 수 있다. 또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이 아니라 도시재생에 관심을 보이는 민간 부문의 건축가들도 공간복지를 구현할 수 있다. 도시공감협동조합의 건축가들은 “민간이 운영하는 공유 공간들은 수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수익을 내야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며 “주민들이 원하는 공유 공간을 앞으로 더 늘려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
#후암동 공유공간#후암서재#공간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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