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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사망 ‘0’… 보행천국 비결은 “승용차를 불편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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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사망 ‘0’… 보행천국 비결은 “승용차를 불편하게 하라”

최지선 기자 입력 2018-11-05 03:00수정 2018-11-05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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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운전 차보다 사람이 먼저다]<18>인구 40만, 스위스 취리히의 실험
크리스티안 토마스 IFP 전 사무총장
지난달 22일(현지 시간) 스위스 취리히 불링거 광장의 회전교차로. 바닥에 숫자 ‘20’이 선명하게 적혀 있는 게 눈에 띄었고, 파란색 표지판에는 도로로 뛰어드는 아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중앙역과 가까운 이곳은 6개 도로가 만나 교통량이 많다. 하지만 제한최고속도는 시속 20km였다. ‘20존’이라는 의미다. 차량이 통행할 수 있지만 20존에서는 보행자가 언제나 통행의 우선권을 갖는다. 무단횡단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다. 제한최고속도가 최저 시속 30km인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오후 2시부터 1시간 동안 불링거 광장을 지켜봤지만 회전 교차로라는 것을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조용했다. 보행자들이 회전 교차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건너도 경적을 울리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 인구 40만 취리히, 교통사고 사망자는 ‘0명’

취리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걷기 좋은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인구가 40만 명이지만 지난해 교통사고 사망자는 0명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보행자 중심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진화 중이다. 국제보행자연맹(IFP) 전 사무총장이자 스위스 총책임인 크리스티안 토마스 박사와 6시간 동안 취리히 도심을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보행자 중심 도시를 위한 ‘마법의 레시피’는 없다. 도시마다 다른 해결책이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거창한 계획이 아닌 ‘디테일’이 사고를 줄인다는 점이다.”


토마스 박사는 길을 나서기 전 ‘섬세함’을 강조했다. 2015년 보행안전 국제세미나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기도 했던 그는 “서울은 매우 큰 도시인 만큼 차량이 많고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도로로 나온 자동차는 보행자에게 잠재적 위험 요인이 된다. 자동차가 속도를 내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고 차량 이용이 줄도록 대중교통 체계를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스위스 취리히 불링거 광장 바닥에 ‘20’이라는 하얀색 글씨가 적혀 있다. 최고 제한속도 시속 20km인 ‘20존’을 뜻한다. 20존에서는 보행자가 항상 통행 우선권을 갖기 때문에 무단횡단 개념이 없다.
스위스 취리히 곳곳에 있는 ‘20존’ 표지판. 어린이가 도로로 뛰어드는 모습을 표현해 운전자 주의를 요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취리히 교통안전의 가장 큰 목표는 자동차 이용이 불편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취리히는 도심 도로의 제한최고속도가 시속 30∼50km다. 국내에서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도입 중인 ‘안전속도 5030’을 교과서처럼 지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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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속 처분도 엄격하다. 어린이 보호구역(스쿨존)에서 과속 사실이 적발되면 경우에 따라 면허를 바로 박탈한다. 이날 찾은 스쿨존 5개 앞에는 모두 과속단속 카메라가 있었다. 운전자는 운전면허를 취득하더라도 1년간 ‘교육면허(learner license)’를 발급받아 운전하면서 과속 등 법규를 위반하지 않아야 정식 면허를 받을 수 있다.

그 대신 대중교통이 자가용 이용보다 훨씬 편하도록 교통체계를 정비했다. 기차와 노면전차(트램), 버스 간 환승에 걸리는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배차 간격을 정확히 맞췄다. 토마스 박사는 “취리히역 44번 게이트에 내려서 역 앞 트램 정류장까지 성인 걸음으로 7분이 걸린다. 보행자가 급하게 서두르거나 기다리지 않아도 되도록 배차 간격을 정확히 관리한다”고 말했다.

보행자 통행이 잦은 지역은 신호 간격을 좁혀 운전자를 불편하게 한다. 취리히역 앞 횡단보도는 1차로 도로인데도 보행자 신호등이 있다. 이 신호등은 30초마다 초록불로 바뀐다. 신호 한 번마다 자동차가 대여섯 대밖에 지나갈 수 없다. 토마스 박사는 “자동차가 보행자를 헤집고 운전해야 하는 구조라 어떤 운전자도 역 앞을 지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

○ 왕복 2차로에도 보행섬 설치

스위스 취리히에서 가장 붐비는 벨뷰역 인근. 트램과 버스, 자동차와 보행자가 모두 이용하는 도로지만 지난해 사망 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보행자들이 도로를 자유롭게 가로지르고 있다.
도로 중앙에 있는 ‘보행섬’은 스위스 보행자 보호의 상징이다. 취리히에는 왕복 2차로 도로에도 대부분 보행섬이 있다. 걸음이 느린 어린이, 고령 보행자를 위해서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스위스에서도 고령자 교통사고가 중요한 과제가 됐다. 스위스 교통국에 따르면 전체 교통사고 사상자 가운데 65세 이상 노인 비율은 1990년 21%, 2000년 27%, 2010년 31%, 2015년 38%로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2015년의 경우 고령자 교통사고 가운데 38%가 보행자였다. 이 때문에 스위스 정부는 고령 보행자에게 ‘균형감각을 위해 손에 짐을 들지 말고 배낭을 멜 것’ ‘보행섬에서 반드시 멈췄다가 길을 건널 것’ ‘형광색 물건을 몸에 지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취리히 시내를 6시간 걷는 동안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는 한 대도 발견하지 못했다. 보행자가 길을 건널 때는 멀리서부터 속도를 줄였고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보행섬에 멈춰 서 있으면 오히려 지나가라고 손짓했다.

○ 경찰관이 유치원에 가서 교통안전 교육
스위스 취리히의 한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이 횡단보도 건너는 법을 배우고 있다.
스위스 취리히 리마트구트 유치원 어린이들이 교통안전교육을 받은 뒤 실습을 하고 있다. 왕복 2차로인데도 보행 약자를 위해 교통섬이 설치돼 있다.
지난달 23일 취리히 리마트구트 유치원 4세 반에 제복을 입은 경찰관 크리스티안 셸리바움 씨가 나타났다. 1년에 2번 있는 교통안전교육을 위해 경찰관이 직접 방문한 것. 실내 연습을 마친 아이들은 유치원 앞 왕복 2차로 도로의 횡단보도를 혼자서 건넜다.
스위스 횡단보도는 눈이 왔을 때도 잘 식별 되도록 노란색을 사용하고 있다.
교통안전교육을 받고있는 4세 어린이가 경찰관이 보는 앞에서 혼자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스위스 교통안전 교육은 한국과 다른 점이 많다. 우선 길 건너는 법을 바로 가르치지 않고 안전하게 걷는 법부터 가르친다. 보도를 반으로 나눴을 때 차도 쪽이 아닌 길 안쪽으로 걸을 것을 강조한다.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자동차가 멈췄는지 확인하는 방법이다. 셸리바움 씨는 “어린아이들은 차가 멀리서 올 때 속도가 줄고 있는지 인지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며 “동그란 바퀴가 굴러가지 않는지 확인하라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또 운전자와 반드시 눈을 맞추라고 강조한다. 운전자가 자신을 보고 있는 걸 확인한 뒤 횡단보도로 발을 떼도록 한다. 교통안전 교육은 16세까지 받는다.


취리히=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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