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원숭이’가 욕심 낸 조선 자기, 패전국 日 부활시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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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잊혀진 전쟁 ‘정유재란’<22>
22화: 한중일에 휘몰아친 전쟁 후폭풍

일본 사가현의 아리타 도자기마을. 조선 사기장 이삼평이 이곳에서 일본 최초로 백자를 구워냈다. 패전 후 도자기 수출로 경제대국으로 부흥한 일본은 이삼평을 도조(陶祖)로 추앙하고 있다. 아리타=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일본 사가현의 아리타 도자기마을. 조선 사기장 이삼평이 이곳에서 일본 최초로 백자를 구워냈다. 패전 후 도자기 수출로 경제대국으로 부흥한 일본은 이삼평을 도조(陶祖)로 추앙하고 있다. 아리타=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발발 22개월여 만에 종결됐다. 노량해협에서 대패한 왜군은 부산본영으로 집결해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임진년인 1592년 왜군의 침략으로 시작돼 7년간 조선 땅을 유린한 임진·정유 전쟁은 마무리됐다. 하지만 전쟁의 후유증은 컸다. 한·중·일 3국 모두에 거대한 후폭풍이 들이닥쳤다.

조선을 침략한 ‘섬나라 사루’(원숭이·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별명)는 결국 무모한 재롱을 부린 대가로 권력 기반마저 송두리째 잃고 말았다. 1598년 8월 히데요시는 죽기 전 원로그룹인 고다이로(五大老)에게 애원하다시피 유언을 남겼다.

“거듭거듭 히데요리(히데요시의 아들)를 부탁합니다. 당신들 다섯 사람만 믿습니다.”(일본 모리가문 문서 3)

그러나 다섯 명의 야심가 중 가장 선두에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이후의 최고 권력자가 되고자 했다. 결국 히데요시 권력의 중추를 이루던 세력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동군(東軍)과 히데요리의 계승을 지지하는 서군(西軍)으로 분열됐다. 조선 침략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는 히데요시의 혈족이면서도 동군에 가담했고, 호남지역 침공의 주역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서군에 서서 대립했다. 순천 왜교성 전투에서 고니시와 함께 농성전을 벌였던 마쓰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리노부 등 4명의 다이묘는 전우의 회유를 물리치고 동군 편에 섰다.(일본 ‘大村記’)

양측의 대립은 1600년 동군 승리로 끝났고, 고니시가 참수된 것을 비롯해 서군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히데요시의 처자도 모두 죽어 가문은 멸문하고 말았다. 히데요시를 배신해 동군에 가담한 가토 가문도 이에야스의 눈 밖에 나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로써 1603년 새로운 권력인 에도(江戶·도쿄) 정권이 출현했다.

조선에 구원군을 보냈던 명나라도 전후 정세가 편치 않았다. 명의 황제 만력제(萬曆帝·재위 1572∼1620년)는 은화 780만 냥 이상의 군비와 수백만 섬에 달하는 군량을 조선에 보냈다. 만력제 재위 시절 잇따른 2개의 변란에 더해 조선 전쟁으로 국고는 비었다. 만력제 자신은 황태자 책봉 문제로 대신들과 대립하면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결국 그의 사후 명은 이자성의 농민반란을 겪으면서 멸망의 길로 들어서 북방 만주족인 청나라로 대체됐다.

전쟁 피해 당사국인 조선은 전란으로 150만결의 토지가 50만결로 줄어들 정도로 국토가 황폐해졌다. 전쟁으로 죽은 조선 백성들의 숫자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고, 왜군에게 잡혀간 9만여 명의 포로 중 공식적으로 조선에 송환된 이는 73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심각한 반성을 할 겨를도 없이 전후 복구책에 급급했다.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조세 정책과 5군영의 군제 개혁이 이뤄졌을 뿐, 부강한 국가를 만들려는 정책 전환도, 당쟁에 대한 반성도 없었다. 왜군과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서로 반목했던 당쟁은 전후에도 여전히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정쟁으로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 결국 조선은 정유재란이 끝난 뒤 38년 만에 다시 청의 침략을 받아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는 병자호란(1636년)을 맞았다.

조선 지원한 明, 만주족에 정권 뺏겨

히데요시가 탐을 냈던 조선 차 사발인 이도다완. 하단의 매화피가 특징이다. 이동천 제공
히데요시가 탐을 냈던 조선 차 사발인 이도다완. 하단의 매화피가 특징이다. 이동천 제공
중국에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던 명청 교체기는 일본에 엄청난 기회로 작용했다. 중국 도자기를 사려는 유럽의 돈(銀貨)이 일본으로 향했다. 유럽의 도자기 수입상들은 명청 교체기의 혼란과 청의 폐쇄적 정책으로 중국 도자기 구입이 어려워지자 일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일본은 정유재란 후 도자기 강국으로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기껏 토기류의 도기 제작 수준에 머물러 있던 일본은 당대 최첨단 기술인 세라믹(자기) 제조법을 익혀 중국 도자기의 대체 시장으로 부상했다. 조선 사기장(도공)들이 구워낸 도자기 덕분이었다. 일본은 도자기를 팔아 아시아의 경제대국으로 다시 부상했다. 조선 사기장들을 대거 납치해온 히데요시의 ‘공로’가 제일 컸다.

히데요시는 일찌감치 다도(茶道) 및 다도기(茶陶器)가 당대 최고급 문화이자 고가의 보물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전국(戰國)시대 최고권력자이자 다인(茶人)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다완 정치’를 그대로 따라 했다. 고가의 다완을 재테크 수단으로 적극 수집하는 한편, 오사카성과 히젠나고야성에 황금다실(黃金茶室)을 차려 놓고 다회(茶會)를 열어 다이묘들에게 다완을 하사하는 식으로 충성을 확인하는 정치를 펼쳤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은덕을 기리는 편지에서 “다도는 정치의 도”라는 말까지 남겼다.(熊倉功夫, ‘資料による茶の湯の歷史·上’)

히데요시 주변의 다이묘와 무사들 사이에서 조선 차 사발인 이도다완(고려다완)을 헌상하는 것은 권력자의 환심을 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됐다. 이도다완은 일본의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센 리큐(千利休·1522∼1591년)가 천하제일로 꼽은 다완이다. 고급 이도다완은 일본성 한 채 값에 비유될 정도로 고가의 보물이었다. 그러니 히데요시가 침략 전쟁을 벌이면서 조선 땅에서 이도다완을 찾느라 혈안이 됐을 텐데, 그 어디에도 이도다완을 획득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찻잔 아래쪽 문양인 매화피(梅花皮)가 특징인 이도다완은 조선에서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서만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귀한 다완이었다. 조선 어디서나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막사발이 아니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 대안으로 일본에서 직접 만들기 위해 조선 사기장 납치를 지시했다. 왜장인 히라도(平戶)의 영주 마쓰라 시게노부에게 보낸 슈인조(朱印狀·붉은 도장이 찍힌 명령서)와 ‘히라도 도자기 연혁 일람’의 1598년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한국에서 7년의 전쟁을 끝내고 웅천(熊川)의 도사(陶師) 거관(巨關) 등 100여 명의 한국인과 같이 돌아왔다. (중략) 그보다 먼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고야 대본영에 있을 때 시게노부 공에게 명하여 도사를 데려오게 하였다. 시게노부 공은 특히 웅천의 도사 종차관(從次貫)을 나고야 진중에 보냈다. 도요토미는 그곳에 가마를 차려서 다기를 만들게 하였다.”(‘平戶窯沿革一覽’)

당시 전 세계에서 중국과 조선만 보유하고 있던 최첨단 도자기 제작 기술이 히데요시의 이도다완 집착으로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황금 알 낳는 거위’된 조선 사기장

조선 사기장들의 후예인 14대 이삼평(왼쪽)과 14대 심수관. 400년 넘게 조상들의 업을 이어오고 있다. 아리타·가고시마=박영철 기자
조선 사기장들의 후예인 14대 이삼평(왼쪽)과 14대 심수관. 400년 넘게 조상들의 업을 이어오고 있다. 아리타·가고시마=박영철 기자
기자는 정유재란기에 일본으로 납치된 조선 도공의 자취를 찾기 위해 일본 도자기의 본향 규슈를 최근 두 차례 방문했다. 먼저 규슈 서북부 사가(佐賀)현의 아리타(有田)를 찾았다. 사가 번주(藩主)인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150여 명의 조선 도공을 붙잡아와 도자기를 만들게 한 곳 중 하나다. 한적한 산간 지역인 아리타 마을은 곳곳에 우뚝 솟아 있는 가마의 굴뚝과 가마에 사용하는 내화 벽돌로 만든 돌담길이 인상적이었다.

아리타의 상징인 도잔(陶山)신사는 일본의 도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는 조선 도공 이삼평(?∼1655년)의 혼을 모신 장소다. 1658년 세워진 신사는 360년의 연륜이 배어 고색창연했다. 이삼평이 이곳에 자리 잡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베시마에게 붙잡혀온 이삼평은 도자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바탕흙인 태토(胎土)를 구하지 못해 수년간 찾아 헤매다 마침내 1616년 아리타 동부 이즈미야마(泉山)에서 고령토(백토)가 함유된 양질의 자석광을 발견했다. 그는 조선 도공 18명을 데리고 와 이곳에서 ‘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열어 일본 최초로 백자를 생산해냈다. 이후 아리타 지역은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지가 됐다.

아리타의 도자기는 나가사키항 데지마의 외국인 거주지에 머물던 유럽인들의 눈에 띄어 70년 동안 약 700만 점이 유럽 등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고, 일본 자기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지금도 유럽의 많은 궁전에는 당시 사들인 아리타 도자기가 소장돼 있다.

아리타 사람들은 이삼평을 ‘대은인(大恩人)’이라고 표현한다. 이삼평 덕분에 아리타 사람들이 지금도 도자기를 만들고 있고, 아리타 도자기로 일본이 경제강국으로 성장했으니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주민들은 1916년 도잔신사 뒷산에 ‘도조 이삼평비’라고 새겨진 거대한 돌기둥을 세웠고, 매년 5월 4일 그를 기리는 도조제를 지내고 있다.

이삼평(일본명 가네가에 산페이)의 14대손(56)이 기자에게 건넨 명함에는 이름이 ‘14대 이삼평’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초대 이삼평이 만든 가마는 4대에 이르러 맥이 끊겼고, 5대 이후부터는 남의 가마에서 도자기 지도 교육을 하거나 다른 업에 종사했다. 그러다 그의 부친인 13대가 1971년 ‘이삼평’이라는 이름을 단 가마를 차려 200년 만에 다시 맥을 이었으며, 14대인 그는 부친 밑에서 도자기 제작 수련을 하다가 2005년에 습명(襲名·선대의 이름을 계승)했다고 한다.

14대 이삼평은 “중간에 맥이 끊겨서 일본에서도 ‘이삼평 가마’를 알아보는 사람이 적은 편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이삼평 가마’가 잘돼야 한다고 응원을 많이 해주고 있고 한국에서도 일부러 찾아와 용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는 이어 아리타에서 16km 정도 떨어진 이마리(伊万里) 근교의 오카와치야마 마을을 찾았다. 나베시마 가문이 고급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외부로 새나가지 않도록 험준한 바위산 속에 가마를 만든 마을인데, ‘신비의 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도공무연탑(陶工無緣塔)’과 ‘고려인의 비’로 더 유명하다. 도공무연탑은 주민들이 마을 곳곳에 버려진 사기장들의 무덤에서 880개의 비석을 모아 쌓은 탑이다.

그밖에도 규슈에는 여러 지역에서 활동한 조선 사기장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규슈 남쪽 가고시마 현 미야마(美山)에는 전북 남원에서 끌려온 심당길과 박평의 등 조선 사기장의 후예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 사쓰마번주였던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붙잡혀온 이 지역의 사기장들은 사쓰마야키(薩摩燒)라는 도자기 유파를 열었다. 특히 심당길은 조선식 오름가마를 고집했고, 박평의와 함께 ‘불만 일본 것이고 나머지는 조선의 솜씨’라는 뜻의 ‘히바카리(火計り) 다완’을 만들어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메이지시대까지도 한복을 입었고, 한국말을 하였으며, 조선의 서당식 교육을 했다. 뿌리를 잃지 않기 위해 음력 8월 15일이면 옥산궁(玉山宮)이라는 단군 사당에 모여 고국을 향해 제를 지냈다.

이곳의 도예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심당길의 12대 후손인 심수관(沈壽官)이 1873년 조선식 가마에서 구워낸 도자기(大花甁)를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출품하면서부터다. 그 후손들은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습명해 현재 15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업에서 은퇴한 14대 심수관(91)은 기자와 만나 “나의 삶은 대를 이어 오면서 벌인 역사와의 고된 싸움”이라고 회고했다.

그들은 왜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나?

이마리에 살고 있는 일본인 도공들이 ‘고려인의 비’에서 공양을 하는 모습. 조선 사기장들의 공덕을 기리는 제사다. 이마리 나베시마도자기협동조합 제공
이마리에 살고 있는 일본인 도공들이 ‘고려인의 비’에서 공양을 하는 모습. 조선 사기장들의 공덕을 기리는 제사다. 이마리 나베시마도자기협동조합 제공
정유재란 당시 일본은 조선 사기장만 납치해 간 건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당시 파견 부대에 전투 병력 외에 따로 특수 임무를 띤 6개 부를 두어 운영했다. 도서·공예·포로·금속·보물·축부의 6개 약탈 전담부가 그것이다. 도서부는 조선의 전적(典籍)을, 공예부는 각종 공예품과 공장(工匠)을, 포로부는 조선의 젊은 남녀를, 금속부는 병기 및 금속예술품을, 보물부는 금은보화와 진기품을, 축부는 가축 포획을 전담했다.(국사편찬위원회, ‘韓國史·12’) 이로 인해 수많은 한국의 보물급 문화재, 서적과 금속활자 등이 넘어가 일본의 문화를 살찌웠다.

결국 임진·정유 7년 왜란은 조선과 명은 전쟁에서 이겼으나 피해만 컸고, 침략자 일본은 전쟁에서는 졌으나 챙긴 게 적지 않았다. 특히 일본은 도자기 제조 기술을 획득해 다시 나라를 부강케 함으로써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 측이 이 전쟁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하는 데는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유익한 전쟁이었음을 주장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으로 시작돼 이순신이라는 영웅의 희생으로 마무리된 정유재란은 동북아 최대의 국제전으로, 한중일 3국 모두의 역사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7주갑(1甲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쟁의 최대 피해자였던 조선 백성들의 처참한 삶과 전쟁의 구체적인 갈피들은 잡초에 덮여 있는 남부 지방의 왜성들처럼 사실상 역사에서 잊혀져 왔다. 이제는 망각에서 깨어나야 할 때다.

규슈=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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