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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 절망’ 콘텐츠 시장은 제2의 세기말? 글루미 콘텐츠 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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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 절망’ 콘텐츠 시장은 제2의 세기말? 글루미 콘텐츠 붐

임희윤 기자 , 김민 기자 입력 2019-05-19 16:19수정 2019-05-19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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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제2의 세기말이라 할 만하다. 공포와 죽음, 종말을 다룬 콘텐츠가 문화계 총아로 떠올랐다. 기괴하고 우울한 이미지로 10대의 우상이 된 미국 팝스타 빌리 아일리시의 데뷔앨범 ‘When We All Fall Asleep, Where Do We Go?’ 표지.
“여기 혹시 빌리 아일리시 주황색 카세트테이프 있어요? 와, 여기 있다!”

17일 서울 마포구의 음반 매장 ‘도프 레코드’. 한 고교생이 들어오더니 아일리시의 카세트를 발견하자마자 계산대에 들이밀었다. 18세의 아일리시는 올 들어 가장 뜨겁게 떠오른 신인 팝스타다.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찍더니 노래 ‘bad guy’는 멜론 등 국내 음원차트 10위 안까지 치고 올라왔다. 팬 충성도의 척도인 실물 음반 판매량도 압도적이다. 김윤중 도프레코드 대표는 “‘보헤미안 랩소디’ 이후 퀸 열풍을 아일리시가 이어받았다. 카세트테이프만 200장 가까이 팔렸고 LP레코드와 CD 판매량도 올 상반기 압도적 1위”라고 했다. 그는 “구매자의 절대다수가 10대로, 그들이 이렇게 어두운 음악에 열광하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몽유병, 잔혹극, 공포물을 뒤섞은 음악과 영상이 아일리시의 전매특허다.

서브컬처((Sub-Culture·주변부 문화) 마니아의 전유물이던 음울한 콘텐츠, 이른바 ‘글루미(gloomy) 콘텐츠’가 주류 문화계를 점령하고 있다.


콘텐츠 시장은 제2의 세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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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흥행을 기록한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드라마 ‘왕좌의 게임’도 예외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시리즈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이들은 어두운 분위기의 화면, 영웅들의 잇따른 참패나 죽음으로 블록버스터로서는 이례적인 음울함으로 도배됐다. 일부 관객들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봤다가 더 침울해졌다”고 호소한다. ‘킹덤’ ‘블랙미러’ ‘기묘한 이야기’ ‘버드박스’ 등 기괴하고 어두운 콘텐츠를 내세운 넷플릭스의 대중화도 이런 분위기에 한몫했다.
영화 ‘버드박스’

팝 음악계에서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커트 코베인(너바나)이 대표한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 열풍 이후 자기 파괴적 음악이 이만큼 대중적 열광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는 말이 나온다. 글루미 콘텐츠는 자기 과시와 힘자랑 이미지가 세던 힙합도 접수했다. 지난해 요절한 래퍼 엑스엑스엑스텐터시온이 대표적이다. 그의 곡 ‘SAD!’는 스포티파이 단일 곡 일간 스트리밍 역대 최고 기록(약 1040만 건)을 갈아 치웠다. 강일권 대중음악평론가는 “요즘 대세인 내면의 어두움을 담은 이모 랩(emo rap)은 아예 자살충동, 약물중독, 패배감, 우울증이 주요 소재가 됐다”며 “2017년 래퍼 릴 핍, 2018년 엑스엑스엑스텐터시온이 실제로 비극적 죽음을 맞으며 10, 20대에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됐다”고 했다. 영국의 BBC와 텔레그라프, 미국의 바이스 등도 ‘다크 팝’ ‘테러 팝’ 같은 용어를 쓰며 ‘팝은 왜 점점 더 우울해지는가’ 같은 분석 기사를 앞 다퉈 내고 있다. X세대와 Z세대의 연결고리를 찾기도 한다.

밝고 힘찬 댄스 팝이 점령한 듯 보이는 국내 음악계에서는 신세대 R&B 가수들이 이런 조짐을 보인다. 웹진 ‘아이돌로지’의 미묘 편집장은 “수민, 수란, 제이클레프 등 음악 팬들이 열광하는 신진들의 음악에 어둡고 축축하고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관통한다”고 했다. 올해 한국대중음악상을 받은 제이클레프의 앨범 타이틀곡은 ‘지구 멸망 한 시간 전’이었다.

냉소, 절망…디스토피아적 심리 발현

직장인 김아름 씨(32)는 얼마 전 서점에 갔다 제목과 표지만 보고 만화 ‘기분이 없는 기분’(창비)을 구매했다. 김 씨는 “주인공 부친의 고독사 이후 우울감을 다룬 내용에 뜻밖의 위로를 받았다. 때로는 ‘괜찮아질 거야’ ‘힘내’란 말조차 작은 폭력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만성피로처럼 우울감에 빠져 있었는데 고개를 푹 숙인 주인공의 모습부터 빨려들었다”고 했다. 성인은 물론 아동 출판 시장에서마저 죽음을 다룬 ‘3일 더 사는 선물’(씨드북), 가정폭력 문제를 짚은 ‘아빠의 술친구’(씨드북) 같은 작품이 속속 나와 주목받고 있다.

음울함에 대한 열광은 여러 분석을 낳는다. 밝고 예쁘장한 것들로만 가득한 인스타그램 세상에 대한 피로와 상대적 허탈감이 반영된 것이라는 추론도 나온다. 어두운 사회상을 그대로 비추는 것뿐이라는 일반론도 세다. 미묘 편집장은 “남들의 불행을 보며 이를 관망하는 자신의 처지를 즐기는 심리도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윤석진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현재까지 무한 생존경쟁 구도가 더 고착화됐다. ‘더 이상 메시아는 없다’는 절망감이 영웅에 대한 냉소, 디스토피아적 사고로 나온 것 같다. 밝은 쪽에서는 소확행과 워라밸 추구로, 어두운 쪽으로는 글루미 콘텐츠 붐으로 발현한 셈”이라고 분석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어두운 ‘글루미 콘텐츠’ 청소년에 악영향, “무책임하다” 논란 일자…


넷플릭스 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의 클레이 젠슨(딜런 미네트·사진)은 친구 해나 베이커(캐서린 랭포드)가 목숨을 끊은 이유를 추적하며 고통을 직면하고 내적으로 성장한다. 넷플릭스 제공
우울하고 어두운 ‘글루미 콘텐츠’가 보는 사람들의 감정에 영향을 미칠까? 그렇다면 그 영향은 어떻게 조정해야할까. 이미 미국에서는 이런 콘텐츠의 부작용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넷플릭스 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13 Reasons Why)를 둘러싼 ‘자살 조장’ 논란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29일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루머의…’가 공개된 뒤 청소년 자살률이 증가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 파장을 일었다. 연구는 드라마가 공개된 2017년 4월 미국의 10~17세 청소년 자살률이 28.9%나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드라마와 자살률 사이의 직접적 연관성을 밝힌 것은 아니며, 다른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는 단서가 달렸다. 그러나 드라마의 직접적 묘사를 지적해 온 이들은 넷플릭스가 ‘무책임했다’고 비판했다.

제이 애셔의 2007년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루머의…’는 주인공 해나 베이커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독특한 설정의 드라마다. 10대 소녀인 그는 자신이 목숨을 끊은 13가지 이유를 테이프에 녹음해 남긴다. 해나의 친구와 가족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하나씩 추적하며 타인의 고통에 무심했던 자신을 되돌아본다.

2008년 개봉한 영화 ‘다크 나이트’도 악역 ‘조커’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부모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15세 관람가로 개봉한 영국에서는 영화등급위원회 사상 가장 많은 컴플레인을 받았다. 조커의 사이코패스 같은 성격과 폭력성이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였다. 거센 항의에 국회의원도 지지 성명으로 동참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의식해 넷플릭스 측은 ‘루머의…’의 두 번째 시즌을 공개한 뒤부터 첫 에피소드에 경고 문구와 영상을 삽입했다. 영상에는 출연진이 등장해 “나는 연기자이며 이 드라마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그에 관한 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픽션입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심리적 이슈가 있다면 시청하지 않길 권하며 도움이 필요하면 지역 상담소나 홈페이지를 참고하라”고 직접적으로 안내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출연진이 학교 폭력에 관한 내용을 상담하는 토크쇼도 열린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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