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최형규 형애장학재단 이사장 ‘사후에 밝혀진 진실’

  • 입력 2009년 2월 20일 02시 56분


43년간 6000명의 ‘키다리 아저씨’

4·19의 아픔을 사랑으로 보듬다

4·19의 도화선인 3·15 부정선거 책임자

최인규 前내무의 동생

“배워서 사람을 죽이기보다 못배워도 사람 키우고 싶어”

“배고픔의 세월과, 시대의 모진 질곡의 소용돌이가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열심히 공부하여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셨지만, 아직 저희는 이사장님의 뜻을 따르지도 못하고 있는데….”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강북삼성병원 장례식장. 88세로 생을 마감한 한 남자의 영결식에서 추모사를 읽던 서정희 씨(56·이솝러닝 전문위원)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열세 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해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인 사람. 친형을 형장의 이슬로 떠나보내고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던 사람. 수백억 원의 재산을 6000여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으로 전달하면서도 본인의 이름조차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

서 씨가 추모사를 읽는 동안 35년 전 두 사람의 인연을 맺게 해준 전직 신문기자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등록금이 맺어준 인연

1974년 12월,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운동장.

스물한 살의 청년이었던 서 씨는 고개를 숙인 채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리학과 합격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 합격의 기쁨보다는 등록금 걱정이 앞섰기 때문.

고교를 졸업한 지 4년. 입주 과외, 막걸리 배달, 시장 행상…. 먹고살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예 원서를 내지 않았다면 이토록 아쉽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며칠을 고민하던 서 씨는 불현듯 신문에 소개된 한 여학생이 독지가로부터 등록금 도움을 받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떠올렸다.

무작정 동아일보로 편지를 보냈다. 서 씨의 편지를 본 사람은 사회부 기자이던 이용수 서울낫도 대표(1998년 퇴사). 이 대표는 서 씨의 사연을 1975년 1월 27일자 동아일보 ‘휴지통’란에 소개했다.

기사가 나간 뒤 서 씨에게 한 중년 남자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약속 장소는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 앞 찻집. 서 씨를 만난 중년 남성은 고려대에 등록금 25만 원을 내고 받은 영수증을 건네고는 이름도 알려주지 않은 채 찻집을 빠져나갔다.

그 뒤로 그는 세 차례 더 서 씨의 등록금을 내 주었다. 수소문 끝에 서 씨는 그가 택시회사를 경영하고 있다는 것, 그의 이름이 ‘최형규’라는 것을 알아내고 찾아갔지만 그는 인사도 받지 않았다.

졸업한 뒤 직장인이 된 서 씨는 매년 5월 그를 찾아갔지만, 미리 알고 피하기라도 하듯 매번 자리에 없었다.

인연을 맺은 지 16년 만인 1990년, 이들 세 사람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4·19혁명을 촉발시켰던 3·15 부정선거를 지휘했던 죄로 사형을 당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이 나의 친형”이라며 “내가 죽기 전에는 이 얘기를 세상에 말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죽기전까진 세상에 알리지 말아달라”

故 최 이사장-고학생-前 동아일보기자 ‘34년 운명적 만남’

1975년 본보 고학생 기사보고 장학금 인연

15년뒤 만난 세사람… 그리고 알게된 ‘진실’

이사장 “비밀로 해달라”… 끝까지 약속지켜

○ “4·19의 도화선 3·15 부정선거 책임자의 동생”

당시 택시회사 대표였던 최형규 형애장학재단 이사장은 음식점에 앉자 “45세 때부터 수백 명의 아이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며 “형과 여동생이 있는데, 형이 바로 최인규 씨였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배워서 사람 죽이기보다, 못 배워도 사람을 키우고 싶어 가난한 학생들을 돕고 있다”고 했다.

이 대표는 “이 사연을 기사로 쓰고 싶다”고 말했지만 최 이사장은 “숨어서 돕는 것이 훨씬 편하다”며 기사화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이 대표와 서 씨 두 사람은 최 이사장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1921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난 최 이사장은 흥남비료공장 직공, 연탄 장사, 쌀 장사를 하며 돈을 모았고 1966년 택시회사를 인수했다.

이 무렵부터 최 이사장은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기 시작했고, 그중의 한 명이 바로 서 씨였다.

이 대표는 “최 이사장은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까 봐 동아일보에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며 “직접 고려대 입학처에 문의해 서 씨의 연락처를 알아냈다”고 말했다.

○ “한 알의 모래처럼 장학사업”

최 이사장은 1993년 153억 원을 출연해 자신과 부인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 ‘형애장학재단’을 설립했다. 2004년에는 자신이 오랫동안 살아온 종로구에 70억 원을 전달했고 종로구는 이 돈으로 ‘종로구장학재단’을 설립했다.

하지만 최 이사장은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극구 꺼렸다. 형애장학재단 관계자는 “지금까지 6000여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지만, 장학금을 받은 학생 대부분이 최 이사장의 이름조차 모른다”며 “그 흔한 장학금 전달식 사진 한번 찍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최 이사장은 자신의 호(號)도 ‘항상 숨어 있는 한 알의 모래처럼 살겠다’는 뜻으로 일사(一沙)로 썼다.

최 이사장이 남몰래 장학금을 내놓은 것은 단순히 가족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대표는 “형에 대한 연민,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던 한(恨), 국가에 대한 감사 등 여러 이유로 장학사업에 매진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서 씨 역시 “최 이사장은 우리나라가 잘사는 방법은 인재 육성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며 “감사하다고 말씀드릴 때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그게 보답하는 길이다’라고 핀잔하듯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3·15부정선거 지휘… 4·19 시위대에 발포 명령

■ 최인규 前 내무장관은

최인규 전 내무부 장관(사진)은 1919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났다.

경성고, 연희전문을 졸업한 그는 미국 뉴욕대에서 공부했고 귀국 후에는 대한교역공사에 잠시 몸담기도 했다.

1954년 광주에서 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신익희에게 졌고 4년 뒤 다시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그는 교통부 장관을 거쳐 1959년 3월 내무부 장관에 임명됐다.

내무부 장관으로 재직 중인 1960년 그는 이승만 정권의 집권 연장을 위한 3·15부정선거를 직접 지휘했다.

당시 그는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 놓고 보아야 한다”며 자치단체장들에게 불법 관권선거를 직접 지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3·15부정선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1960년 4월,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결국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그는 구속됐고, 1961년 12월 3·15부정선거를 지령한 혐의로 서울교도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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