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으로 기억하는 난지도…‘2023 서울정원박람회’에 가보니[김선미의 시크릿가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12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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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지도(蘭芝島)는 본래 난초와 지초가 피는 꽃섬이었다. 조선 시대 김정호의 지도에도 꽃이 피어있는 섬이라는 뜻의 ‘중초도’(中草島)로 기록돼 있다. 맑은 샛강 위로 버드나무가 늘어졌을 그 섬의 꽃향기는 얼마나 그윽했을까. 하지만 그 섬은 1978년 서울시 쓰레기 매립장으로 지정돼 거대한 쓰레기 산으로 변했다. 그 난지도가 2000년대 들어 친환경 재생공원(서울 마포구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으로 거듭났으니 사람으로 치면 어마어마한 인생역전이다.
2023 서울정원박람회의 ‘소리의 정원’을 시민들이 즐기고 있다. 조용준 조경가 제공

6일 시작한 ‘2023 서울정원박람회’(11월15일까지)가 하늘공원에서 열리고 있다. ‘바람, 풀 그리고 정원’이라는 주제에 맞춰 전문 작가, 학생, 시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옛 난지도를 기억해 정원으로 풀어냈다. 척박한 쓰레기 토양에서 살아남은 억새를 형상화하고, 폐 페트병을 재활용해 오브제를 만들었다. 파란만장했던 땅을 지켜본 하늘을 정원의 주인공으로 삼거나 바람이 지나간 길을 만들기도 했다. 하늘공원이라는 장소의 역사적, 공간적 특성이 기존의 알록달록한 정원박람회에 사색의 기운을 드리운 걸까.

2023 서울정원박람회에서 작가정원 은상을 받은 ‘하늘 바람 수영장’. 우리나라 야생화들과 수영장 콘셉트를 억새와 접목시킨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선미 기자

박람회를 둘러보니 전반적으로 기대 이상이었다. 전문 작가들이 꾸민 정원은 가을 억새의 숭고한 경관과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너른 잔디밭에 활짝 펼쳐지는 정원이 아니라 억새밭을 거닐다가 하나씩 만나게 되는 ‘비밀의 정원’이었다. 억지로 채워 넣으려 하지 않고 하늘과 바람과 풀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게 한 점이 돋보였다. 한두 평 땅에 ‘정원을 향한 열정’을 쏟아낸 학생과 시민 참여 정원도 보기 좋았다. 다만 층꽃나무 같은 가을의 식재 재료가 정원마다 엇비슷한 건 어쩔 수 없는 ‘옥의 티’였다.

2023 서울정원박람회 초청정원인 ‘소리의 정원’. 조용준 조경가 제공

특히 신선했던 것은 초청정원을 꾸민 조용준 조경가의 ‘소리의 정원’이다. 그는 ‘높이 98m의 쓰레기 산 위에서 자란 자연에서는 어떤 소리가 들릴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올해 7월부터 9월까지 매시간 5분씩 하늘공원에서 들을 수 있는 자연의 소리를 채집했다. 바람 소리, 메탄가스 소리, 곤충과 새 소리…. 관람객이 접하는 정원의 형태는 정원박람회의 풀밭 위에 만든 지름 9m의 흰색 콘크리트 원판일 뿐이다. 여기에 올라 서서 QR코드에 갖다 대거나 ‘소리의 정원’ 앱을 통하면 쓰레기 산(난지도)에서 생명을 이어온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QR코드에 갖다 대거나 앱을 실행시키면 하늘공원에 사는 동식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조용준 조경가 제공

조용준 조경가는 말한다. “처음에는 거대한 철판을 세우고 숲의 정원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디자인을 할수록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공원에서 아빠와 딸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됐습니다. 이곳이 과거에는 섬이었고, 지금 발아래 쓰레기로 가득한 매립지라는 아빠의 말에 중학생쯤 돼 보이는 딸은 무척 놀라는 반응이었습니다. 아이는 아마도 이곳이 산을 보존해 만든 공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쓰레기 산의 주인은 본래 자연이었습니다. 저는 이 거대한 초지 속에 정원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식물도 심지 않았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소리의 정원’을 만들게 됐습니다.”

하늘공원에 사는 식물들을 레진아트로 구현했다. 김선미 기자

소리의 정원은 음(音) 경관인 ‘사운드스케이프’와 생태학의 만남뿐 아니라 조경의 확장성과 협업 가능성도 보여줬다. 조용준 조경가는 기경석 상지대 산림조경학부 교수와 협업해 자연의 소리를 채집했다. 앱 개발자와 협업해서는 ‘소리의 정원’ 앱을 만들었다. 하늘공원의 식물은 레진아트 전문가들과 협업해 원판 가운데 25개의 레진아트로 구현했다. 꽃범의꼬리, 부처꽃, 닭의장풀, 애기똥풀 등을 현미경으로 보듯 찬찬히 볼 수 있다. 환경적 메시지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한 무용가가 소리의 정원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조용준 조경가 제공

“정원은 자연과 사람을 잇는 매개체입니다. 하늘공원에는 억새라는 강력한 시각적 매개체가 있지요. 하지만 쓰레기 산에서도 살아남은, 자연의 소리라는 청각적 매개체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숲속의 빗소리, 맹꽁이 열차 소리, 파랑새와 말매미 소리를 들어보세요.”

하늘공원은 난지천 공원이나 노을 주차장에 차를 대고 맹꽁이 열차로 오를 수 있다.

다음은 작가 정원을 꾸민 7팀을 만나봤다.


<금상> ‘자연과의 조우’. 이상수 씨
김선미 기자
“전통정원의 정자처럼 열린 담장 요소를 활용해 주변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경관을 조성했습니다. 열린 경관에서 잠시 멈춰 서서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은상> ‘하늘 바람 수영장’. 박아름, 조아라 씨
김선미 기자
“하늘공원의 하늘과 바람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도록 수영장을 구현했습니다. 튜브에 누워 하늘을 보거나 초원에 발을 담가 보세요. 풀 속으로 다이빙하는 상상은 어떨까요. 난지도가 하늘공원이 됐듯, 쓰레기가 예술로 변신하는 걸 보여주기 위해 폐 페트병으로 오브제를 만들었습니다. 바닥과 천장에는 하늘공원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억새를 형상화했습니다.”

<동상> ‘오롯이 널 기억하는 순간’. 이세희, 장지연 씨
김선미 기자
“꽃섬이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이 되고 다시 하늘공원이 된 모든 순간을 하늘은 오롯이 지켜봤을 겁니다. 그래서 하늘을 정원의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정원 뒤편에도 거울 벽을 설치해 하늘을 가득 담았습니다.”

<동상> ‘FLUID GEOMETRY’. 최담희, 김선우 씨
김선미 기자
“난지도의 옛 바람이 주제입니다. 바람이 지나간 길을 정원으로 형상화했습니다. 층꽃나무와 자엽국수나무의 보라색이 스테인레스 스틸 미러와 극적 대비가 되도록 했습니다.”

<동상> ‘일렁이는 바다 언덕’. 홍수연, 경정환 씨
김선미 기자
“하늘공원의 흔들거리는 풀을 보면서 생명이 일렁이는 바다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공원이야말로 생명으로 자리를 지켜온 서울의 바다 아닐까요. 초화와 지피류에 신경을 썼습니다.”

<동상> ‘하늘 파빌리온_하늘, 바람, 풀 그리고 정원을 품다’. 김수연 씨

김선미 기자
“하늘공원의 억새와 정원이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파빌리온이 경관을 감상하는 틀이 되도록 디자인했습니다. 정원을 찾는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쉼을 즐기기를, 일상 자체가 쉼이 되기를 바랍니다.”

<동상> ‘바람, 바람, 바람’. 송민원 씨
김선미 기자
“풍향계가 억새와 어우러져 오브제처럼 작동되기를 바랐습니다. 빛이 잘 머무는 플라스틱 소재여서 하늘공원의 아름다운 노을빛을 머금습니다. 관람객과 빛과 바람으로 교감하기 원합니다.”

억새밭이 이루는 대자연의 경관 속에서 정원의 역할을 보여주는 2023 서울정원박람회. 김선미 기자

한편, 시민들이 만든 ‘모아정원’에서는 풀에 대한 인식을 읽을 수 있었다. ‘풀은 정원의 하얀 구름’, ‘풀은 정원의 보감(寶鑑)’, ‘풀은 정원의 거울’, ‘풀은 정원의 本’, ‘풀은 정원의 싱잉 보울’, ‘풀은 정원의 에너지’, ‘풀은 정원의 무희’, ‘풀은 정원의 回(돌아올 회)’, ‘풀은 정원의 생명의 집’, ‘풀은 정원의 매직 카펫’…. 개인적으로는 작은 정원에 앉아 싱잉 보울을 두드리는 경험이 정원을 명상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시민들이 꾸민 ‘모아정원’ 금상을 받은 이선희, 류근영 씨의 ‘풀은 정원의 하얀구름이다’ 정원. 김선미 기자
학생정원 금상을 받은 송모빈, 정서현 씨의 ‘마음에 부는 바람에: 풀처럼 눕기로 했다’ 정원. 김선미 기자
‘김선미의 시크릿가든’에 소개했던 경기 남양주시 숲새울정원 최가영 씨의 학생정원. 김선미 기자
2023 서울정원박람회에 참여한 서울시민정원사들. 김선미 기자

서울정원박람회에서는 초청정원과 작가 정원뿐 아니라 시민들이 꾸민 모아정원과 학생 정원들을 꼭 둘러보기를 권한다. 그 정원들을 보면서 ‘나라면 어떤 정원을 꾸밀 것인가’ 잠시라도 상상해 본다면 당신은 이미 정원사인 셈이다.

정원문화가 일상에 자리 잡게 되면 마을 주민들이 합심해 골목 정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정원을 가꾸는 미적 경험이 활발한 공동체 참여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정원박람회가 겸손과 돌봄과 같은 우리 마음의 꽃밭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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