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 같던 도쿄 조선대…꿈꿀 수 없는 이곳에서 얇은 벽 너머 자유 꿈꿔”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15일 10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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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련계 재일조선인 2세가 펴낸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

“제게 ‘아무것도 꿈꾸지 말라’고 하는 수용소 같은 곳에서, 저 얇은 벽 너머의 자유를 꿈꿨습니다. 이 책은 제가 그토록 만나길 꿈꿨던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저의 이야기입니다.”

재일조선인 2세인 양영희 감독(59)은 1983년 일본 도쿄 코다이라(小平)시에 있는 조선대 문학부 신입생으로 입학하던 때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북한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운영하는 학교는 입학 첫 날부터 그에게 “너에게 다른 꿈은 허락되지 않는다. 조직에 네 모든 것을 위탁할 것을 맹세하라”고 강요했다.

청바지 금지, 오후 6시 통행금지, 주말 외출금지…. ‘금지의 세계’를 살았던 그는 학교 담장 너머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무사시노미술대 학생들의 삶을 상상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선 북한체제, 다른 한쪽에선 도쿄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예술가들이 다니는 예술대학이 맞붙어 있었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나와 청바지를 입은 저 아이는 정말 같은 세상을 사는 게 맞을까. 다른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만날 수 있을까.’ 양 감독이 조선대에서 지낸 4년 동안 품었던 질문이다.

첫 장편소설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를 펴낸 재일조선인 2세인 양영희 감독.
첫 장편소설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를 펴낸 재일조선인 2세인 양영희 감독.
북한체제에 갇힌 재일조선인 가족사를 풀어낸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2006년)과 ‘굿바이 평양’(2011년),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년) 3부작을 만든 양 감독이 최근 첫 장편소설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마음산책)를 펴냈다. ‘디어 평양’은 2006년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2021년 DMZ다큐멘터리영화제 국제경쟁 부문 대상을 받은 바 있다.

13일 화상으로 만난 양 감독은 “소설 속 조선대생 박미영은 학교 담장 너머 다른 세상을 꿈꿨던 어린 시절의 나”라고 했다.

주인공 미영처럼 양 감독이 조선대 진학을 선택했던 건 “도쿄에서 마음껏 연극을 보기 위해서”였다. 양 감독의 고향은 조총련 소속 재일조선인들이 많았던 오사카다. 14세 때 연극을 접하고 난생 처음 ‘다른 세상’을 만났다. 양 감독은 “남편에게 종속된 채 평생을 살아온 한 여자가 이혼을 요구하며 자기 삶을 찾으러 집을 떠나는 연극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홀로 집을 나서는 여자가 무대 위에서 웃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무대가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걸 무대 위 그 여자를 보면서 깨달았어요.”

학교에선 양 감독에게 외출 금지를 강제했지만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양 감독은 “‘아르바이트를 못하면 학교에 다닐 돈이 없다’고 맞불을 놓은 끝에 결국 내가 이겼다”며 “엄격한 조선대에서도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유롭게 연극을 보러 다녔다”고 했다. 소설 속 미영이 학교 밖을 나와 도쿄 중심가에 연극을 보러 다니다가 교사들에게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히는 장면은 실제 양 감독의 탈선 경험에서 나왔다. 양 감독이 그랬듯 소설 속 미영도 ‘조직에 모든 것을 위탁한다’는 맹세를 끝내 하지 않고, 대신 극단에 들어간다.



양 감독은 “도쿄 조선대에서의 일상과 북한 주민들의 삶은 실제 1980년대 내가 겪고 목격한 것”이라며 “소설에서 내가 100% 지어낸 건 미영이 무사시노미술대에 다니는 일본인 남학생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고 밝혔다. 그는 “그 시절 나는 그들과 내가 국적도 이념도 다르기 때문에 서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며 “‘그때 내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섰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에 넣게 됐다”고 했다. 양 감독은 “그때의 내가 내지 못했던 용기를 지금의 나는 낼 수 있다. 자유롭고 싶고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싶은 꿈을 꾼다는 점에서 우리는 서로 닮아 있다”고 덧붙였다.

“소설 속 시공간은 1980년대 도쿄 조선대이지만 이런 곳은 지금도 어디에나 있어요. 이념, 사상뿐 아니라 어딘가 혹은 무언가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끝내 자기 목소리를 지키는 이야기로 읽히길 바랍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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