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소송까지 간 취객 사망 사고…경찰 책임 어디까지[사건 Zoom In]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13일 18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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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목숨을 잃은 건 경찰의 과실이 명백합니다.”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의 한 법정에서 황모 씨(38·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경찰 미흡 대처로 남편 숨져” vs “스스로 걸어서 귀가해 철수”
황 씨의 남편 강모 씨(사망 당시 40세)는 지난해 5월 서울 종로구에서 회식이 끝나고 술에 취해 귀가하다 강북구 길가에서 잠이 들었다.

강 씨는 오전 2시경 지나가던 행인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발견됐다. 강 씨가 “괜찮다. 혼자 집에 걸어갈 수 있다”고 말한 뒤 스스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경찰은 이내 철수했다.

하지만 강 씨는 약 5시간 후 인근 건물 계단에서 넘어져 숨진 채 발견됐다. 황 씨는 “경찰의 미흡한 조치로 남편이 사망했다”며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13일 동아일보가 입수한 당시 사건 기록에 따르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 결과 강 씨 사인은 급성 알코올 중독사, 외상성 뇌손상, 질식 등이었다.

술에 취한 강 씨가 집으로 착각해 다른 건물로 들어간 뒤, 계단에서 넘어진 뒤 의식을 잃고 호흡 곤란을 겪어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반면 경찰은 주취자 대응 관련 매뉴얼에 따랐을 뿐 과실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동아일보가 입수한 당시 출동 경찰관 3명의 경위서에 따르면 이들은 “(강 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자마자 잠에서 깨 경찰관들의 눈을 마주치고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 판단 능력이나 의사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이지 않았다”며 “매뉴얼에도 이같이 급박한 위험성이 없는 일반적인 주취자는 보호조치 대상자라고 볼 수 없다고 나와 있다”고 설명했다.

● 취객 대응, 경찰 책임 어디까지… 엇갈린 판결에 고심
지난해 11월과 올해 1월 서울 강북구와 동대문구에서 경찰의 조치 미흡으로 취객이 잇따라 숨진 가운데 지난해 5월에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던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유족이 경찰을 상대로 소송을 낸 가운데, 과거 비슷한 사건에서 법원은 엇갈린 판단을 내놨다. 이에 일선 경찰들은 “어디까지 경찰이 개입해야 하느냐”며 취객 대응에 고심하는 분위기다.

2018년 3월 강원 횡성군에선 “술에 취한 사람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가 두 차례 경찰에 접수됐다. 한 건물 1층 주차장에 출동한 경찰은 취객의 “괜찮다”는 말을 듣고 철수했다. 하지만 약 10시간 뒤 취객은 주차장 옆 계단 밑에서 숨진채 발견됐다.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법원은 “국가가 9000여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주취자가 ‘괜찮다’고 말했어도 만취 상태의 무의식적 대답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며 “취객에게 귀가를 당부하기만 하고 현장을 떠난 경찰의 대응은 경찰관 직무집행법에 명시된 보호조치 미흡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반면 정상적인 판단 능력이나 의사능력을 상실한 정도가 아닌 경우 경찰이 보호조치를 강제적으로 발동할 수 없고, 일반적인 주취자는 보호조치 대상자로 볼 수 없다는 2012년 대법원 판례도 있다. 주취자가 또렷하게 자기 의사를 밝힐 수 있는 경우 경찰이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17년 10월 서울 용산구에서 경찰관들이 술에 취해 누워 있는 취객을 부축하며 상태를 묻고 있다. 동아일보 DB.
2017년 10월 서울 용산구에서 경찰관들이 술에 취해 누워 있는 취객을 부축하며 상태를 묻고 있다. 동아일보 DB.


지난달 27일 국회 입법조사처가 발간한 ‘주취자 보호·관리의 쟁점 및 개선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주취자 관련 112 신고 건수는 총 98만 건으로 하루 평균 2600여 건에 달한다.

경찰은 끊이지 않는 주취자 방치 사고에 보호조치 매뉴얼 개선에 착수했다. 경찰청은 현재 운영 중인 ‘주취자 보호조치 태스크포스(TF)’를 이달 말까지 운영하고 관계기관과 개선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하지만 한 일선 경찰관은 “매뉴얼을 개선한다고 해도 제각기 다른 상황에 다 적용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주취자 보호 조치에 시간을 뺏겨 정작 다른 범죄 예방에 실패하면 누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냐”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주취자 관련 대응 매뉴얼을 현실적으로 정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소방, 의료기관과 공조 체제를 확립할 수 있는 근거 마련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장현석 경기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자치경찰제 시행과 맞물려 소방, 의료기관, 지방자치단체가 협력해 권역별로 거점 주취자 전문 대응 시설을 만드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며 “응급시설을 갖춘 지역 병원 중 협력 의향이 있는 곳에 처리 건수별로 국가가 비용을 지급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공조 체제를 시행하는 해외 사례를 참고해 국내 상황에 맞게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영국의 경우 경찰, 소방, 응급구조대 모두 보호조치의 주체”라며 “프랑스도 초동 조치부터 경찰, 119구급대가 공동 대응한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이처럼 공동 대응 체계를 구축하면 경찰관의 의료지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주취자 상태 판단에 허점을 보이게 되는 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최원영 기자 o0@donga.com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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