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죽기전 멜로디]백지 수표보다 값진, ‘백지 앨범’의 미학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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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의 ‘The Beatles’는 백지 앨범의 전형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비틀스의 ‘The Beatles’는 백지 앨범의 전형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임희윤 기자
임희윤 기자
최근 이른바 백지 시위, 백지 혁명이 중국 대륙을 뜨겁게 달궜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은 알았지만, 저마다 치켜든 새하얀 백지 한 장이 중국 정부의 ‘얼굴’을 백지장처럼 질리게 만드는 것을 이번에 봤다. 가벼운 백지의 무거운 힘을 느꼈다. 때론 한 글자의 말줄임표가, 1초의 침묵이 ‘벽돌책’이나 장광설보다 뜨겁게 웅변한다.

#1. 음악계에는 한자로 풀면 백지 아닌 백집(白集)쯤 되는 게 있다. ‘화이트 앨범’이다. 영국의 전설적 밴드 비틀스가 1968년 발표한 9집 앨범 ‘The Beatles’를 통칭한다. 앨범 표지가 새하얗기 때문. 완전한 공란은 아니고 자세히 보면 작은 글씨로 ‘The BEATLES’라 적혀 있다. 초면의 ‘비틀마니아(비틀스 마니아)’들이 안부 묻고 통성명한 뒤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이 대개 “비틀스의 앨범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인데 대표적 대답 중 하나가 이 음반이다. 비틀스 최고의 명작으로는 순회공연 활동을 중단하고 스튜디오 작업에 매진한 1966년 이후의 후기 작품들이 보통 꼽히는데 ‘Revolver’(1966년),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1967년), 화이트 앨범, ‘Abbey Road’(1969년)가 그것이다.

#2. 1960년대 영국 음악계가 ‘백집(白集)’을 낳았다면 1990년대 미국 음악계는 ‘흑집(黑集)’으로 화답했다. 헤비메탈 밴드 메탈리카가 1991년 내놓은 5집 앨범 ‘Metallica’, 일명 블랙 앨범이다. 커버는 마치 두꺼운 성서의 겉장처럼 새까만데 자세히 보면 보일 듯 말 듯한 회색 선으로 ‘METALLICA’라는 글씨와 똬리 튼 뱀 그림이 새겨져 있다. 화이트 앨범만큼이나 ‘과묵한’ 커버다. 흥미롭게도 메탈리카 팬들의 ‘최고 명반’ 설전은 비틀스와 반대로 밴드의 초기 앨범들이 소재다. 1983년 데뷔작 ‘Kill ’Em All’부터 ‘Ride the Lightning’(1984년), ‘Master of Puppets’(1986년), ‘…And Justice for All’(1988년) 그리고 블랙 앨범이다.

#3. 블랙 앨범과 화이트 앨범이 보는 이, 듣는 이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유사하다. ‘이 앨범은 말이 필요 없어. 색채도 그다지 필요 없지. 어서 그냥 틀어보라니까. 어때, 죽이지?’ 마치 이런 말을 묵언으로 속삭이는 듯하다. 판촉을 위한 과장된 포즈, 화려한 색채, 예술적 표현의 격전장에서 한 발짝 떨어져 통념을 역주행한다. 비틀스는 ‘Ob-La-Di, Ob-La-Da’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Blackbird’ ‘Helter Skelter’를 비롯한 숱한 명곡을 그들 커리어에서 유일한 정규 더블(두 장짜리) 앨범인 이 역작에 담았다. 23일 넷플릭스 공개를 앞둔 추리 영화 기대작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의 제목도 이 앨범 수록곡 ‘Glass Onion’에서 따온 것. 메탈리카는 ‘Enter Sandman’ ‘Sad but True’ ‘The Unforgiven’ ‘Nothing Else Matters’ 등의 명곡들을 블랙 앨범에 포진해 화력을 뿜었다. 과연 백문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아니 백지(또는 흑지)가 ‘불여일청(不如一聽)’이랄까.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데뷔 앨범(왼쪽 사진)은 바나나 껍질을 벗기면 과육이 보이게끔(오른쪽 사진) 제작됐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데뷔 앨범(왼쪽 사진)은 바나나 껍질을 벗기면 과육이 보이게끔(오른쪽 사진) 제작됐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4. 화이트 앨범이나 블랙 앨범의 명성에 못잖은, ‘준(準)화이트’, ‘준블랙’ 앨범도 있다. 미국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1집 ‘The Velvet Underground & Nico’(1967년)는 새하얀 바탕에 밴드 이름도 생략했다. 그저 바나나 한 개만 덩그러니 그려둔 표지로 유명하다.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작품. 중국의 백지 혁명 과정에서 일부 시위자가 백지 위에 ‘시진핑 하야’와 발음이 비슷한 ‘바나나 껍질 새우 이끼’라 적어놓은 것이 떠오른다. 앨범의 초판은 바나나 그림을 스티커로 제작해 껍질처럼 벗겨내면 분홍색 속살이 나오게끔 만들었다. ‘준블랙’ 앨범은 호주 록 밴드 AC/DC의 1980년 7집 ‘Back in Black’(QR코드)이다. 시커먼 커버에 얇은 회색 선으로 밴드명과 앨범 제목만 써넣은 작품. 전 보컬 본 스콧의 요절을 추모하는 뜻에서 까만 표지를 택했다. 제목은 검은 옷을 입고 돌아온다는 뜻. 우리의 수의(壽衣)가 흰색이라면 서구권의 수의는 검정이므로 이는 망자의 세계에서 부활해 귀환함을 의미한다.

#5. 백지 시위는 일단 중국 정부의 일보 후퇴로 멈췄다. 그러나 정부가 민의를 또 한번 거스른다면? 어쩌면 성난 군중은 ‘껍질’을 벗고 거리로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검은 옷을 입은 채로….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백지#앨범#비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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