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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對美 주화파 묵살한 日군부, 핵 파국 재촉하다[박훈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2-12-09 03:00업데이트 2022-12-09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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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 연합함대가 진주만을 기습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휴일을 틈탄 공격이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지만 그 비열함에 분노한 미국인들은 일치단결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일찍이 미일 충돌을 애타게 바랐던 이승만은 1942년 6월부터 몇 차례에 걸쳐 미국의 소리(VOA) 단파방송으로 조선인들을 격동시켰다. 이 연설은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으니 독자분들도 꼭 들어 보시기 바란다. 일본에 처절하게 맞서 온 중국도 환호성을 질렀다. 후스(胡適)의 말대로 일본이 마침내 ‘할복’을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 “日 패망 임박” 강조

1940년 미국은 태평양함대를 본토 샌디에이고에서 하와이 진주만으로 옮겼다. 이것으로 일본이 자원의 보고인 동남아시아를 침략할 때, 병참선을 끊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일본은 동남아를 침략하려면 진주만을 동시에 공격해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진주만 기지를 무력화시킨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이어 미국과 영국령인 필리핀, 말레이반도,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상상치도 못한 전과에 일본 전체가 흥분했다. 서양에 대한 오랜 피해의식에 찌든 일본인들에게 이 초기의 성공은 마약과도 같았다. 멀쩡하던 문인들도 전쟁 찬양에 나섰고, 식민지 조선의 일부 유명 문인들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후스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고 판단했다. “나는 이승만입니다”로 시작하는 단파방송은 구한말 만민공동회 시절부터 명연설로 유명했던 그답게 조선인들의 가슴을 쳤다. ‘생명의 소식’, ‘불벼락’ 등 기독교 냄새 나는 용어와, 마치 부흥회 목사의 설교를 연상시키는 리드미컬한 웅변은 지금 들어도 매우 선동적이다. 오랫동안 대일 무력투쟁 시기상조론과 무용론을 견지했던 이승만은 이 연설에서 전 조선인의 무력투쟁을 촉구했다. “우리 내지와 일본과 만주와 중국과 시베리아 각처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행할 직책이 있으니,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이 타상(打傷)하시오. 적병의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 버리시오. 언제든지 어데서든지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해야만 될 것입니다.” 폭포와 같이 쏟아지는 그의 연설은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입니다”라며 끝을 맺었다. 이 단파방송 연설은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고, 조선인들 사이에서 이승만의 권위와 지명도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미드웨이 전투로 승기 잡은 美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군부를 대표한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가 1943년 필리핀 마닐라 인근 니콜스 필드 공군기지에 도착해 
일본군을 사열하는 모습(위 사진). 이듬해 필리핀 전투에서 일본군 30만 명 이상이 사상하는 대패를 당한다. 아래 사진은 
1945년 6월 미군 B-29 폭격기가 일본 오사카 시내에 폭탄을 투하하는 장면.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의 집중 폭격으로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지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군부를 대표한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가 1943년 필리핀 마닐라 인근 니콜스 필드 공군기지에 도착해 일본군을 사열하는 모습(위 사진). 이듬해 필리핀 전투에서 일본군 30만 명 이상이 사상하는 대패를 당한다. 아래 사진은 1945년 6월 미군 B-29 폭격기가 일본 오사카 시내에 폭탄을 투하하는 장면.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의 집중 폭격으로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지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은 연일 승전보를 울리며 축하 파티에 취했지만, 미국은 일본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했다. 기술과 자원, 그리고 국민의 자발적 전쟁 지지에서 일본을 압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국의 생산력과 사기의 격차는 더 벌어졌다. 진주만 기습 반년 만에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4척을 잃고 대패했다. 이걸로 사실상 전세는 기울었고 패전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이 와중에도 일본의 육군과 해군은 작전이나 비행기 생산 계획, 자원 분배 등 여러 문제를 놓고 다투었다(마리우스 잰슨 ‘현대일본을 찾아서2’). 심지어는 작전 정보조차도 공유하지 않았다. ‘일본인은 잘 단결한다’는 속설은 여기서는 예외였다.

일본의 사려 깊은 지식인들은 이미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고, 일부 정치인들은 군부정권을 타도하고 신정권을 수립한 후 미국과 교섭하여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군부 정권은 전쟁을 고집했다. 그러는 사이 사이판, 필리핀, 이오지마가 차례로 함락되고 일본 여러 도시에 대한 무지막지한 폭격이 시작됐다. 특히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 지역은 폐허가 될 정도였다. 필리핀 전투에서만 일본군 사상자 수는 30만 명을 넘었다. 이런 패배들의 책임을 지고 도조 히데키는 정권에서 쫓겨났지만, 군부는 본토 결전을 고집했다.

천황에 종전 상소 올렸지만…






1945년 2월 히로히토 천황에게 종전 협상 권고 상주문을 올린 고노에 후미마로 전 일본 총리.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1945년 2월 히로히토 천황에게 종전 협상 권고 상주문을 올린 고노에 후미마로 전 일본 총리.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히로히토 천황은 여전히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미군의 다음 상륙 목표는 오키나와, 그리고 규슈였다.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전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마)는 1945년 2월 히로히토를 만난 자리에서 상주문을 올렸다. 뜻밖에 여기서 고노에는 ‘공산 혁명’에 대한 위기감을 토로했다. 교전국인 미국에 대해서는 한 글자의 비난도 하지 않고, 오직 소련이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벌이는 ‘적화’ 공작에 대해 우려했다. 원래 중산층 이하 출신이 많은 군 장교들 중에는 공산주의에 호감을 갖는 이들이 많고,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확대하여 마침내 대동아전쟁에까지 오게 된 것은 이 군부 내 일당들이 (국내 혁명을 위해) 의도적으로 꾸민 계획이었던 것이 이제 명확해졌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전쟁은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1억 총옥쇄(總玉碎)’를 부르짖는 자들은 “소위 우익이라고 불리지만 배후에서 이들을 선동하고 국내를 혼란에 빠뜨려 마침내 혁명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는 공산분자”라고 단언한다. 군부 정권에 탄압받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아연실색할 논리다. 고노에가 볼 때 미국은 타협 가능하고 말이 통하는 상대였지만, 소련과 공산당은 천황제를 비롯한 일본의 기존 체제를 갈아엎을 진짜 ‘적’이었다. 일본 군부는 그들에 물들어 있으니 천황이 결단하여 그들을 일소하고 전쟁을 끝내 달라는 것이었다. 고노에는 미군 진주 후 자살했지만, 함께 상주문을 만들었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미 군정하에서 총리를 지내며 전후 일본의 반공노선을 이끌었다. 고노에 상주문에 보이는 세계 정세와 소련 위협에 대한 인식이 해방 후 이승만의 그것과 비슷한 점도 흥미롭다.

고노에 상주 사건이 발각되자 요시다는 헌병에 체포되었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일본 군부는 미군이 상륙해 천황을 처형할 것에 대비해 메이지 천황의 후손 중 한 명을 산악지대에 숨겨놓으려는 웃지 못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리고 여자들까지 죽창 훈련을 시켰다. 1945년 4월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했고 참혹한 전투 끝에 양국 군인을 제외하고도 주민 10여 만 명이 죽었다. 그래도 결정을 못 내리던 히로히토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나서야 NHK를 불러들였다. 항복 선언을 녹음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눈치챈 일부 군인들이 녹음테이프를 빼앗으려 궁궐에 난입했지만 찾지 못했다. 1945년 8월 14일이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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