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산한다, 고로 존재한다[고양이 눈썹]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16일 15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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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021년 12월


▽“특별한 대책 없이 직장을 잠시 그만 뒀을 때였다. 하루를 강제하던 루틴이 사라졌으니 불안과 시간이 동시에 증가했다. 불안과 시간은 글쓰기에 가장 좋은 연료다. 연료가 마구 쏟아지니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냐며 그냥 쓰기 시작했다…불안과 시간을 연료로 쓰면서도 글쓰기보다 즐겁고 생산적(?)인 일은 세상에 많을 것이다.

칫솔로 꼼꼼히 꽃게를 손질하고 황금 레시피로 며칠을 재워 간장게장을 만들어 놓을 수도 있고, 배낭에 속옷가지만 챙겨 스킨스쿠버를 하러 훌쩍 동해바다로 떠날 수도 있다. 중국어를 배우고 드럼 연주를 한다거나 어두운 체리색 방문에 화사한 페인트를 칠할 수도 있다…인간이 하는 일이 모든 일이 사실 불안과 시간을 이기기 위한 것 아닌가.”

- 이윤주 작가의 책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중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해 이토록 간단명료하고 솔직하게 정리한 글을 본 적이 없습니다. 불안을 다스리려고 생산을 하다니요. 불안은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공포입니다. 즉 생산을 못 한다면 공포에 휩싸여 지낸다는 뜻이겠죠. 거꾸로 말하면 불안이 생산의 원동력일 수도 있겠습니다. “인류는 생산력의 발달로 역사를 앞으로 굴려왔다”는 경제학자나 역사학자의 해석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뭔가 일을 벌이지 않을 때 불안해합니다.

인간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끊임없이 뭔가를 만들고 생산하며 삽니다. 생산 자체가 삶의 목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2018년 5월
2018년 5월


▽뭔가를 생산한다는 것은 자신만의 도구를 손에 쥐고 있다는 뜻입니다. 도구를 쥐고 자기 계획대로 생산을 합니다. 그리고 평생을 걸쳐 생산을 축적하면 그것이 자신의 인생이 되는 것 아닐까요. 생산은 자기 주도적인 삶의 증표이자 존재감입니다. 인생은 ‘시간’으로 구성돼 있다고 하죠. 그 시간에 이룬 일들이 축적되고 결과물로 남아 삶을 대표합니다.

가정주부는 가족을 돌보고, 작가는 글을 쓰고, 블루칼라는 제조하고, 3차 산업 노동자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선생님은 가르치고 사진가는 사진을 촬영합니다. 자원봉사자는 어려운 분들을 돕고, 성직자는 신도를 만나고 기도합니다. 선수는 운동을 하고 유튜버는 영상을 창작합니다.

2019년 7월
2019년 7월

이 모든 것이 생산활동입니다. 생산하는 힘만이 사람의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Man the Maker)’라는 말을 통해 만드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봤습니다. 주변 환경을 변화하고 뭔가를 만드는 동시에 그를 통해 자신도 빚어간다고 했죠. 즉 자신의 일과 생산 이력의 그 자신이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올바른 방향의 생산만이 유효합니다. 중독과 구별해야 합니다. 도박, 알콜, 마약 그리고 권력과 범죄는 중독되기 쉬운 방향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아, 일중독도 조심해야 합니다.

▽20년가량 병마와 싸우면서 “세상은 다 버티는 것이다”라고 말해 온 ‘서른 살이 심리학자에게 묻다’의 저자 김혜남 정신분석전문의는 지난해까지 책을 10권 출간했습니다. 그에게 ‘버티기’는 글쓰기, 즉 일과 생산이었습니다.

(참고 https://www.donga.com/news/People/article/all/20211129/110498889/1)

지겹고 고통스런 일이 왜 ‘버티기’가 되고 삶 자체가 되는 것일까요? 일본 벤처기업의 원조이자 자동 계측 장비 회사 ‘호리바제작소’ 창업자인 고 호리바 마사오(1924~2015)는 자신의 책 ‘일 잘 하는 사람 일 못 하는 사람’(2000년)에서 이런 얘기들을 합니다.

“일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일중독과는 구별됨).”

“작아도 좋으니, 성공을 쌓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일을 잘 하게 된다…성공의 축적은 곧 자신감의 축적이다.”

일과 생산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그것이 쌓이면 자신감 즉 자존감과 존재감을 동시에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존재의 이유가 생산에 반영돼 드러나는 것이죠.

▽잠시 들른 옷 수선집 침봉을 보며 한 우주를 봤습니다. 사장님부부의 삶을요. 제임스 웹이 잡은 은하빛 못지않게 아름답습니다. 두 개인이 함께 쌓아올린, 평생의 생산 이력이 있음을 느꼈으니까요. 일과 생산, 노동을 하는 모든 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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