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대신 총… 우크라 스포츠 선수 3000명 전장서 싸운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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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우크라전쟁 5개월, 스포츠는 지금
전쟁터서 경기장서 뛰는 스타들
스포츠계 우크라 돕기 한마음
‘스포츠 정치 중립’ 전통 깨



《러시아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의 대규모 체육 시설은 공습 대상이 됐다. 체육 시설 수백 곳이 파괴됐고 체육인 10만 명은 훈련할 곳을 잃었다. 하지만 이들은 전장에서, 경기장에서,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러 침공에 맞선 우크라 스포츠 선수들


세계복싱기구(WBO) 헤비급 챔피언 출신인 비탈리 클리치코 키이우 시장이 3월 체르니히우 군사훈련소에서 훈련에 열중하고 있다. 사진 출처 비탈리 클리치코 인스타그램
세계복싱기구(WBO) 헤비급 챔피언 출신인 비탈리 클리치코 키이우 시장이 3월 체르니히우 군사훈련소에서 훈련에 열중하고 있다. 사진 출처 비탈리 클리치코 인스타그램
우크라이나에는 스포츠가 사라졌다. 스포츠 선수도 마찬가지다.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우크라이나의 많은 스포츠 선수들이 경기장이 아닌 전쟁터에서 총을 잡고 있다.

복싱 헤비급 세계챔피언 출신 비탈리 클리치코 키이우 시장과 올림픽 복싱 2연속 금메달리스트 바실 로마첸코, 바이애슬론 전 국가대표 예브게니 말리셰프, 축구선수 비탈리 사필로 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많은 선수들이 군에 입대했다. 전쟁 중에 말리셰프, 사필로 등처럼 유명을 달리한 선수도 많다. 바딤 구체이트 우크라이나 체육부 장관은 9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쟁에서 사망한 우크라이나 운동선수 및 지도자 수가 100명이 넘고 포로로 22명이 잡혀 있다고 밝혔다. 아직 전장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우크라이나 선수들은 약 3000명에 달한다.
○ 훈련할 곳 잃은 체육인만 10만 명
전쟁 발발 후 5개월이 다되가면서 전쟁의 여파는 전장의 인명 피해를 넘어 스포츠 인프라 전반으로 퍼진 지 오래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3일 수도 키이우에서 열린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과의 회담에서 “체육 시설 수백 곳이 파괴됐다. 체육인 10만 명 이상이 훈련할 곳을 잃었다”고 전했다.

힘든 상황이지만 우크라이나 선수들은 각자의 경기장에서 조국의 이름을 걸고 싸우며 전쟁 속 희망을 싹 틔우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침공을 받은 뒤 3월 4일부터 열린 2022 베이징 겨울 패럴림픽에서 역대 최고 성적인 종합 2위(금 11, 은 10, 동 8)를 기록했다. 노르딕스키 남자 시각장애 부문 금메달리스트인 비탈리 루키야넨코는 “우린 우크라이나에서뿐 아니라 이 경기장에서도 싸우고 있다. 여러분이 전쟁을 멈추는 데 힘을 보태줬으면 한다”는 소감을 전했다.



우크라이나 축구대표팀은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플레이오프에서 맹활약하며 전쟁에 지친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축구대표팀은 플레이오프 준결승에서 스코틀랜드를 3-1로 꺾고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후 첫 본선 진출에 1승만 남겨뒀다. 우크라이나 선수들의 활약은 ‘축구 황제’ 펠레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펠레는 스코틀랜드와의 준결승이 열린 지난달 1일 푸틴에게 “오늘 우크라이나인들은 90분만이라도 조국을 휘감은 절망을 잊어보려 한다”며 “이 경기를 빌려 요청을 드리겠다. 이 전쟁을 멈춰 달라. 어떤 분쟁도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비록 우크라이나는 플레이오프 결승전에서 웨일스에 0-1로 패해 월드컵 본선 무대 꿈을 접어야 했지만 올렉산드르 페트라코프 대표팀 감독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았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우리의 노력을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 우크라이나 스포츠 정상화 돕는 세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에버턴 선수들이 2월 영국 리버풀의 구디슨파크에서 열린 맨체스터시티전에서 우크라이나 국기를 몸에 감고 입장하고 있다. 사진 출처 에버턴 인스타그램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에버턴 선수들이 2월 영국 리버풀의 구디슨파크에서 열린 맨체스터시티전에서 우크라이나 국기를 몸에 감고 입장하고 있다. 사진 출처 에버턴 인스타그램
우크라이나의 국민스포츠는 축구다. 프로축구 리그인 우크라이나 프리미어리그(UPL)는 지난해 12월 경기가 끝난 뒤 3개월 겨울 휴식기에 들어갔다가 전쟁으로 중단된 상황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체육부는 8월 23일부터 UPL 경기를 무관중으로 다시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경기장에는 안전을 위한 군 보안 인력이 상주한다. 또 경기장은 공습 및 공습경보 시 대피시설로 활용하기 위해 방공호 등 시설도 갖출 예정이다.

본격 개막에 앞서 UPL 디나모 키이우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에버턴과의 친선경기에 초대받았다. 에버턴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인 2월 27일 맨체스터 시티전에서 우크라이나에 연대를 표시하는 의미로 선수들이 경기장 입장 때 우크라이나 국기를 몸에 감았다. 에버턴은 29일 열리는 친선경기 수익을 우크라이나 구호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다.

구체이트 장관은 “체육인들을 비롯한 정부군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선수들이 훈련을 이어 나갈 수 있다”며 “세계·유럽 선수권, 그리고 2024년 파리 올림픽을 준비하는 선수들을 위한 훈련 시설 복원이 우크라이나 정부의 우선순위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바흐 IOC 위원장도 키이우 방문 때 100여 명의 국가대표 선수들을 만나 “올림픽 커뮤니티는 여러분을 절대 홀로 두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이 올림픽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IOC는 우크라이나에 선수 훈련 보조 지원금을 기존의 세 배인 750만 달러(약 98억 원)로 늘리기로 했다.
○ 스포츠의 정치적 중립 허문 우크라이나 연대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앞줄 왼쪽)이 3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국가대표 선수들을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 출처 우크라이나 올림픽 국가위원회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앞줄 왼쪽)이 3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국가대표 선수들을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 출처 우크라이나 올림픽 국가위원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오랫동안 절대적 명제로 여겨졌던 스포츠의 ‘정치적 중립’ 개념을 바꿔놓고 있다. IOC와 FIFA는 국제사회의 비판에도 러시아 푸틴 정권이 2014년 겨울 올림픽, 2018년 월드컵을 여는 것을 허용했다. 이어 중국의 2022 베이징 겨울올림픽, 카타르의 2022 월드컵 개최가 연달아 확정되자 이들 단체는 권위주의 국가의 대외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스포츠 워싱’에 놀아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중립에 집착했던 IOC, FIFA조차 푸틴의 명분 없는 전쟁 앞에서는 강경히 대응했다. IOC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나흘 만에 러시아는 물론 러시아 침공을 도운 벨라루스 선수들의 모든 국제대회 참가 금지를 발표했다. FIFA도 같은 날 러시아 팀의 FIFA 대회 참가를 금지했다. 러시아는 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항소했지만 CAS도 이 제재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10일 폐막한 윔블던 테니스 대회는 러시아·벨라루스 선수들의 참가를 금지하면서 남자 세계 랭킹 1위 다닐 메드베데프(러시아)라는 흥행 카드도 포기했다. 윔블던 측은 “러시아·벨라루스 선수들이 윔블던 잔디코트를 밟도록 할 경우 러시아의 정치적 승리를 도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윔블던은 우크라이나에 연대를 표하기 위해 1세기 넘게 유지된 드레스 규정까지 이례적으로 완화했다. 윔블던은 선수들의 의상, 소품, 신발까지 ‘올 화이트’를 요구한다. 이번 대회 에서 흰색이 아닌 속옷 색깔이 비쳐 경기 중 속옷을 갈아입으라는 지시를 받은 선수도 있었다.

하지만 윔블던은 이번 대회에서 연대 표시를 위해 선수들이 우크라이나의 상징색(노란색-파란색)이 포함된 심벌을 달고 경기에 뛸 수 있도록 허락했다. 여자 세계 랭킹 1위 이가 시비옹테크(폴란드)는 모자에 우크라이나 상징색 리본을 달고 경기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중계됐다.


임보미 기자 bom@donga.com
#우크라이나#스포츠 선수#전쟁#스포츠 정치 중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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