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상처투성이 과거를 치우고 현재를 돌려주는 일이란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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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클리너/세라 크래스너스타인 지음·김희정 옮김/464쪽·2만3000원·열린책들

살인, 자살, 홍수, 화재 현장 등을 청소하는 호주의 특수 청소회사 STC 서비스의 창업자 샌드라 팽커스트가 청소 의뢰인의 집 
앞에서 삽을 들고 서 있다. 드래그퀸이자 트랜스젠더, 성노동자이기도 했던 팽커스트는 자신이 소수자로서 겪은 상처들을 토대로 타인의
 트라우마를 어루만지는 일을 20년간 해오고 있다. 유튜브 화면 캡처
살인, 자살, 홍수, 화재 현장 등을 청소하는 호주의 특수 청소회사 STC 서비스의 창업자 샌드라 팽커스트가 청소 의뢰인의 집 앞에서 삽을 들고 서 있다. 드래그퀸이자 트랜스젠더, 성노동자이기도 했던 팽커스트는 자신이 소수자로서 겪은 상처들을 토대로 타인의 트라우마를 어루만지는 일을 20년간 해오고 있다. 유튜브 화면 캡처
누렇게 바랜 침실 벽을 타고 흐르다 마른 갈색 액체, 얼룩진 카펫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가지, 파리가 우글거리는 냉장고 안….

사람이 산다고 상상하기 어려운 이 공간은 성범죄자 셰인의 집이다. 여성과 단둘이 있는 것이 금지된 그의 집에 아무렇지 않게 발을 들인 여성 샌드라 팽커스트. 그는 호주의 특수 청소회사 STC 서비스의 대표다. 살인 자살 약물중독 학대 등 재앙이 휩쓸고 간 자리를 치워온 그에게 셰인의 집은 특별할 것이 없다. 다목적 세제와 병원용 소독제를 섞어 침실 문과 욕실 바닥의 얼룩을 지우고, 포르노 잡지 더미를 가리키며 셰인에게 묻는다. “이것들 중 버려야 할 게 있나요?”

샌드라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한 트랜스젠더이자 한때 생계를 위해 성매매를 하기도 했던 성노동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폭행을 당한 강력범죄 생존자이기도 하다. 호주의 논픽션 작가인 저자는 4년 동안 샌드라와 함께 특수 청소 현장을 찾아가 샌드라의 삶과 일을 책에 담았다. 샌드라는 자살현장이나 정신질환 또는 육체적 장애로 오랫동안 방치된 집들을 청소한다.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청소하는 샌드라의 삶도 트라우마 덩어리였다. 샌드라를 입양한 양부모는 아들을 낳은 뒤 샌드라에게 “너를 입양한 건 실수였다”는 말을 일상적으로 내뱉었다. 알코올의존자(알코올중독자)였던 양아버지는 일을 나갔다가 돌아오면 샌드라를 향해 손찌검을 하고 발길질을 했다. 가정에서 사랑받지 못한 그에겐 세상 역시 냉혹했다. 여장을 하고 성매매를 했던 샌드라는 소수자 중 소수자였다. 길거리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모습이 경찰에 발각되면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유년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학대, 사회에서 성소수자로서 겪은 폭력은 오히려 샌드라에게 포용력을 길러줬다. 그는 밑바닥에서의 경험을 통해 인간에게 따뜻한 유대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는다.

저자는 성폭행의 상처가 아직도 몸에 아로새겨져 있는 샌드라에게 성폭행 전과가 있는 셰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괜찮겠냐고 묻는다. 이에 샌드라는 이렇게 답한다.

“고객의 상황이 어떻든 상관없이 난 그 이면을 봐요.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그냥 정신질환의 증세일 뿐이에요.”

오물이 카펫을 뒤덮어 악취가 코를 찔러도 샌드라는 결코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다. 집주인들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죽은 쥐 수십 마리를 모으는 동물 조련사의 집부터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숨진 35세 여성의 집까지…. 샌드라와 저자가 함께 다녔던 공간들은 이 세상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곳들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돌봐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샌드라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발판 삼아 기꺼이 타인의 트라우마 속으로 들어간다. 불결함과 추악함으로 찬 공간을 깨끗이 청소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는 샌드라는 자신을 쓰레기 더미 속에 놓아 버린 이들의 마음 깊은 곳 상처까지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트라우마 클리너#살인#자살#청소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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