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너는 누구야?[김수현의 세계 한 조각]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17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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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 오늘 밤에도 세상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중입니다. 지난 밤 당신이 놓쳤을 수도 있는 세계 각국의 소식들, ‘세계 한 조각’이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순식간에 바뀌는 세상만사, “잠깐! 왜 이러는 거지?” 여러분의 궁금증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드라마 ‘국민의 종’에 출연 중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그는 평범한 역사교사에서 하룻밤 사이 대통령이 된 바실 홀로보로드코 역을 맡았다.
드라마 ‘국민의 종’에 출연 중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그는 평범한 역사교사에서 하룻밤 사이 대통령이 된 바실 홀로보로드코 역을 맡았다.


여기, 30대 평범한 역사교사가 있습니다. 이름은 바실 홀로보로드코. 평소처럼 가족에게 치이면서 출근을 준비하는 그에게 양복 차림 남자가 찾아와 인사합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통령님.”

‘하룻밤 사이’ 대통령이 된 이 남자, 알고 보니 본인만 모르는 인터넷 스타였습니다. 한 학생이 몰래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그가 정치인을 ‘까는’ 영상은 인터넷에서 공전의 히트를 칩니다.

드라마 ‘국민의 종’ 장면.


물론 현실은 아닙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015년 제작, 주연한 TV 드라마 ‘국민의 종’입니다. 이 드라마는 실제 정치인들의 부패와 협잡에 지친 우크라이나 국민에게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습니다. 젤렌스키는 드라마의 인기를 등에 업고 2018년 ‘국민의 종’ 당을 출범시킵니다. 여세를 몰아 2019년 5월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73% 지지를 받으며 진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유대인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어린 젤렌스키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어린 젤렌스키


우크라이나가 옛 소비에트연방공화국(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 13년 전인 1978년 젤렌스키는 현 우크라이나 중부 크리이우-리의 ‘평범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고 친척 중에는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희생자들도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탈(脫)나치화를 위해 ‘특별군사작전’을 펼친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침공 명분’에 그가 코웃음 치는 이유입니다.

당선 직후 고향 크리이우-리에 방문해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은 젤렌스키. 그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할아버지는 나치로부터 우크라이나를 지킨 영웅”이라고 말했다.
당선 직후 고향 크리이우-리에 방문해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은 젤렌스키. 그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할아버지는 나치로부터 우크라이나를 지킨 영웅”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어


젤렌스키는 유년 시절 가정에서 우크라이나어 대신 러시아어를 사용했고 대학을 졸업한 뒤 배우를 할 때도 러시아말로 된 작품에 많이 출연합니다. 2019년 대선 때 상대 후보이자 당시 현직 대통령이던 페트로 포로셴코는 ‘군대 언어 신념’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그의 모어(母語)를 공격했습니다. 러시아말을 쓴다는 거였죠. 당시 젤렌스키는 ‘모두 같은 우크라이나인’이라며 점잖게 반격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의 침공 우려가 점점 고조되던 올 1월 젤렌스키가 국가 모든 인쇄물을 우크라이나어로 출판하도록 하는 법안에 서명했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어로 출판할 경우 반드시 우크라이나어로도 출판해야 해, 사실상 공공영역에 내 러시아어 사용을 제한했다는 평가입니다. 통합을 강조하던 젤렌스키에게도 변화가 생겼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잠깐:
우크라이나는 인구의 약 78%는 우크라이나계, 18%는 러시아계로 구분됩니다. 지역에 따라 우크라이나어-러시아어 사용 비율은 격차가 큽니다. 서부에서는 대부분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반면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동부로 갈수록 러시아어 사용 비율이 높아집니다. 젤렌스키가 태어난 중부는 두 언어 사용 비율이 비슷합니다.


●법학과


젤렌스키는 키이우국립경제대학 법학과 출신입니다. 그러나 졸업하기 전 배우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만든 퍼포먼스그룹 ‘크바르탈 95(Kvartal 95·태어난 크리이우-리 중심 구역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는 1997년 TV 코미디 대회 결승전까지 올라 유명해집니다.

우크라이나 전통 의상을 입고 드라마 ‘국민의 종’ 촬영 중인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전통 의상을 입고 드라마 ‘국민의 종’ 촬영 중인 젤렌스키.


졸업하고 코미디 전문 스튜디오 ‘크바르탈95’를 공동 설립해서 많은 코미디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출연합니다. 크바르탈95는 코미디뿐만 아니라 드라마 영화까지 발을 넓히면서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유명한 스튜디오로 우뚝 섭니다. 그의 대표작은 신랄한 정치 풍자 드라마 ‘국민의 종’입니다.

●당선


“나는 한평생 우크라이나를 웃기는 데 바쳤다. 향후 5년간 당신들이 웃을 수 있게 모든 일을 할 것이다. 우크라이나인이여, 울지 말라.”

2019년 5월 수도 키이우에서 대통령 취임식에서 젤렌스키 신임 대통령이 취임 선서 후 메이스(mace·곤봉 모양의 지팡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2019년 5월 수도 키이우에서 대통령 취임식에서 젤렌스키 신임 대통령이 취임 선서 후 메이스(mace·곤봉 모양의 지팡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배우는 배역을 따라간다고 했나요. 2019년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젤렌스키는 포로셴코 대통령을 꺾고 승리합니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단 9%만이 ‘정부를 신뢰한다’고 할 정도로 기존 정치에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죠. ‘부패 척결’과 ‘기득권 세력 타파’라는 구호를 들고 나온 그에게 국민은 열광했습니다. 결선투표 73% 득표율이 이를 증명합니다.

정치 경력이 전무한 그를 의심하는 눈초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 최대 부호이자 ‘국민의 종’이 방영된 채널 ‘1+1’ 소유주 이호르 콜로모이스키가 그의 후원자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젤렌스키 역시 올리가르히(신흥 재벌)의 꼭두각시에 불과할 것이라는 우려였죠.

●‘주춤’


젤렌스키는 지난해 10월 조세회피처를 통해 거액의 재산을 은닉하고 탈세를 해왔다는 의혹에 휩싸입니다. 지지율은 같은 달 24.7%까지 떨어집니다.

지지율은 그전부터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기반이 부족했던 그는 크바르탈95 동료들 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외교와 국방 같은 전문성이 필요한 자리에 배우 연출가 등 동료들을 앉혔습니다. 크바르탈95 총감독 이반 바카노프를 국가정보국장에 임명한 것이 우크라이나 안보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반 바카노프 우크라이나 국가정보국장
이반 바카노프 우크라이나 국가정보국장


지지율 반등을 노리고 젤렌스키는 지난해 11월 ‘반(反)재벌법’에 서명합니다만 지지율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젤렌스키가 러시아를 처음부터 적대한 것은 아닙니다. 취임 초 그는 “평화를 위해선 자리도 내놓겠다”면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 및 강제 병합이 만들어낸 동남부 돈바스 지역 내전 종식 의지를 드러냅니다. 그는 러시아가 지원하는 돈바스 지역 분리주의 반군 세력 포로와 러시아가 억류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인사 35명의 맞교환에 성공하기도 합니다.

2019년 10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열린 대규모 반(反)러시아 시위. 시위대는 “우크라이나 동부 반군 분리주의 점령 지역 내 자치 선거 및 특별 자치권 반대”를 외쳤다.
2019년 10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열린 대규모 반(反)러시아 시위. 시위대는 “우크라이나 동부 반군 분리주의 점령 지역 내 자치 선거 및 특별 자치권 반대”를 외쳤다.


그러나 그의 평화 구상은 “푸틴에 굴복하지 말라”는 시민들의 대규모 저항에 직면합니다. 대다수 우크라이나 시민의 반러시아 정서는 뿌리가 깊습니다. 2013년 11월 당시 우크라이나 정부가 유럽연합(EU) 가입 계획을 철회하고 친러시아로 돌아서자 수도 키이우를 중심으로 대규모 반(反)정부 시위가 일어납니다. 2014년 2월 시위대와 정부군이 키이우 마이단(독립) 광장에서 유혈 충돌한 끝에 정부는 굴복하고 퇴진합니다. ‘마이단 혁명’입니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러시아 영향 아래 살기보다는 서방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튿날인 지난달 25일 젤렌스키는 키이우 대통령 집무실 건물 앞에서 참모들과 함께 찍은 영상을 공개합니다. “나는 여기 있다.” 이 한마디로 러시아가 불을 지피던 그의 해외도피설은 잠잠해집니다. 다음날, 그의 안전이 위험하다며 피신차량을 제공하겠다는 미국 제안에 젤렌스키가 “차량(ride)이 아니라 총탄(ammunition)을 원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미국의) 대피 제안이 실제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보도도 있습니다만 우크라이나는 물론 세계의 가슴을 뛰게 만든 건 확실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다음 날인 지난달 25일 젤렌스키가 키이우 대통령 집무실 건물 앞에서 찍어 올린 영상.


“내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는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다. 우리는 어제처럼 오늘도 국가를 홀로 지키고 있다.”(젤렌스키)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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