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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국제

[르포]“러서 30km, 푸틴이 가장 탐내던 땅” 잠 못드는 우크라

입력 2022-01-22 03:00업데이트 2022-01-22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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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국경도시 르포]
북동부 요충지 하르키우 주민들… 2014년 크림반도 침공 악몽 떠올려
“푸틴-루카셴코는 피의 형제” 21일 오전 우크라이나 북동부 국경도시 하르키우의 도심 게시판에 블리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을 ‘피의 형제’라고 비난하는 사진(점선 안)이 붙어 있다. 이를 한 남성이 쳐다보고 있다. 러시아는 합동 군사훈련을 이유로 우크라이나 북쪽의 친러 국가인 벨라루스에 병력을 집결시킨 상태다. 하르키우=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이곳은 푸틴이 가장 탐내던 땅이에요. 이번에는 우리 차례가 될지 걱정됩니다.”

21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북동부 도시 하르키우 중심가에 있는 자유의 광장(Pl´oshcha Svobod,). 이곳에서 만난 시민 언드리 씨(41)는 “설마 전쟁이 나겠나”라고 말하면서도 이런 불안감을 드러냈다.

같은 시간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한 회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외교적 해법을 끝내 찾지 못하면 언제라도 우크라이나 북동부를 중심으로 배치된 13만 러시아군의 침공이 이뤄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이날 만난 주민들의 대답에서 묻어났다.

광장 옆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입에 핏자국을 그리고 ‘피의 형제’라고 비판하는 사진이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이를 보던 시민들은 고개를 저으며 “푸틴은 전범(戰犯)”이라고 했다.

인구 140만 명의 이 도시는 러시아까지의 거리가 불과 30km에 불과한 국경도시다. 수도 키예프에 이어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다. 특히 우크라이나 북동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탓에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되면 점령될 가능성이 가장 큰 도시로 꼽힌다.

주민 알렉세이 씨는 “러시아는 너무 나쁘다”며 “침공하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불안해했다. 하르키우 주민 중 상당수는 내전으로 얼룩진 동부 돈바스 지역을 피해 2014년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돈바스는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 동남부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한 뒤 친러 분리주의 반군과 우크라이나 정부군이 분쟁 중인 도네츠크, 루간스크 지역 등을 뜻한다. 하르키우는 돈바스에서 250∼300km 거리다.

2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 마리우폴에서 우크라이나군 병사들이 친 러시아 반군과의 대치 지역에서 근무하고 있다.마리우폴=AP/뉴시스


“러 접경, 장갑차-총소리 잦아져… 이번엔 우리 차례 될까 불안”


러, 8년전 돈바스 일부 지역 장악… “다시 침공하면 하르키우 가능성”
우크라 국민 “전범 푸틴에 맞서야”… ‘레지스탕스 법안’ 만들고 항전 의지
도심 곳곳 “영광 되찾자” 플래카드… 국경거주 한국 교민 탈출 준비
“美-러회담 결렬대비, 짐 싸놨다”


20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루간스크주 졸로테의 러시아 접경지역에 배치된 우크라이나 병사가 바깥을 향해 소총을 겨누고 있다. 사진 출처 게티이미지코리아
21일 만난 하르키우 시민들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돈바스 지역에서 일어난 8년 전 악몽이 재연될지 우려했다. 이번에 러시아군이 전면전을 벌이지 않더라도 국지전이 벌어지면 혼란이 클 것이라고도 했다. 그럼에도 러시아에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 도심에는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영광을 되찾자’는 플래카드가 보였다.
○ 8년 전 악몽 떠올라 불안한 시민들
“8년 전 러시아가 침공한 후 고향은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난 13세, 10세 아이가 있는 가장이에요. 러시아가 또 침공하면 안전한 곳을 찾아 다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해요….”

돈바스 지역인 도네츠크에서 2014년 이주한 자영업자 예브게니 씨(44)는 한숨을 쉬었다.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병합한 뒤 돈바스 지역은 러시아를 등에 업은 분리주의자들이 시위를 일으키고 반정부 단체를 구성했다. 이들 분리주의 반군은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교전을 벌였다. 예브게니 씨는 “당시 10층 아파트에 살았는데 9층에 로켓이 날아왔다”며 “공권력도 마비돼 식료품 가게, 슈퍼마켓, 전자제품 상가 등이 약탈당하는 대혼란이 벌어졌다”고 회상했다.

돈바스 지역인 루간스크에 가족이 살고 있다는 마리야 씨(33)는 “(루간스크의) 부모님이 ‘총소리와 장갑차 소리가 가끔씩 들리다가 요즘은 자주 들린다’고 말해 걱정이 된다”고 전했다.

돈바스의 기억 때문에 러시아 침공에 대한 하르키우 시민들의 두려움은 더 커보였다. 주민 이라슬라프 씨는 기자에게 “이곳은 푸틴이 가장 빼앗고 싶어 하는 곳”이라며 “전략적 요충지라서 이곳만 차지하면 (우크라이나) 북동부 일대는 장악된다”고 했다. “러시아가 침공하면 2014년 루간스크와 도네츠크 일부가 러시아에 장악된 것처럼 이번에는 하르키우 차례일 것 같다”며 불안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국가경비대 홈페이지
2014년에도 러시아가 돈바스에 이어 하르키우를 장악할 것이란 소문이 퍼져 수도 키예프로 피신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일부 시민은 우크라이나 내 친러 분리주의 반군에 대해 “그들은 친러가 아닌 그냥 러시아인”이라며 경멸조로 말했다.

자신을 ‘경제학자’라고 밝힌 세르게이 씨는 “그저 러시아가 침공하지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이라며 “돈바스 지역을 비롯해 우리가 사는 곳은 러시아 땅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영토”라고 힘줘 말했다.

러시아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대한 반감과 분노도 컸다. 푸틴을 ‘전범(戰犯)’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음악 일을 한다는 바긴스키 파벨 씨는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세계 공동체가 광기 넘치는 푸틴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며 “푸틴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대신 러시아 내부 문제에 집중하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 반러 정서에 높아지는 나토 가입 여론
우크라이나 국가경비대 홈페이지
반(反)러시아, 반푸틴 정서가 커지면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침공 이후를 상정한 법안까지 마련했다. 1일 발효된 침략군에 대한 저항운동을 뜻하는 ‘레지스탕스’ 법안이다.

공식 명칭이 ‘국민저항법’인 이 법안은 외세의 대규모 침공으로 정부나 군대가 기능을 잃으면 국민이 조국 보호에 참여한다는 내용이다. 민간인도 법적 민병대를 조직해 전투할 수 있도록 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국민저항법 발효 직후 “우크라이나는 스스로를 방어할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라고 밝혔다.

러시아에 대한 반감은 러시아가 반대하는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여론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우크라이나 국제공화연구소(IRI) 등이 실시한 여론조사들에서 ‘나토 가입 찬성’은 54∼64%로 나타났다.

스티븐 닉스 IRI 국장은 “외부로부터 오는 위협을 서방 군사공동체에 가입해 방어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화되고 있다”고 전했다. 하르키우 주민 파벨 씨는 “러시아의 침공 압박에 오히려 우리(우크라이나)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다”며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을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 800여 명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에는 한국 대기업 10곳, 중소기업 10곳 등이 사업을 하고 있다. 국경지대에 사는 한국 교민 A 씨는 “미-러 회담 결과가 좋지 않으면 바로 수도 키예프로 이동하려고 짐을 쌌다. 실제 침공 결정이 난 후 탈출하려면 너무 늦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우크라이나 한국대사관은 24일 교민 간담회를 열고 러시아 침공 수위에 따른 단계별 대응 방안 등을 설명할 예정이다.

하르키우=김윤종 특파원


하르키우=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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