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하정민]‘준비된 국무장관’의 부진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9월 14일 워싱턴 의회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 철군 관련 상원 청문회에서 손을 이마에 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미국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수니파 무장단체 탈레반이 아프간 전역을 장악하는 등 상황이 악화되자 이날 청문회에서는 주무 장관인 그에게 의원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워싱턴=AP 뉴시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9월 14일 워싱턴 의회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 철군 관련 상원 청문회에서 손을 이마에 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미국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수니파 무장단체 탈레반이 아프간 전역을 장악하는 등 상황이 악화되자 이날 청문회에서는 주무 장관인 그에게 의원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워싱턴=AP 뉴시스
하정민 국제부 차장
하정민 국제부 차장
미국 국무장관은 대통령, 부통령, 하원의장에 이은 권력 서열 4위 직책이다. 외교 수장을 이 정도로 높이 대우하는 나라가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미국이라는 패권국에서 차지하는 외교정책의 비중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동맹과 적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척을 졌고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장관 또한 본업보다 상원의원 출마 저울질 같은 ‘자기 정치’를 우선시한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폼페이오는 아들 데려오기, 개 산책, 음식 배달 같은 사적 업무에도 경호원 등을 투입해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에 토니 블링컨 현 장관이 올해 1월 취임했을 때 미국 안팎의 기대는 그야말로 높았다. 그는 부친과 숙부가 모두 대사를 지낸 외교관 가문에서 태어났다. 빌 클린턴 행정부의 크리스토퍼 워런 장관 이후 28년 만에 국무부 부장관을 거쳐 부처 수장에 오른 내부 인사 출신이어서 부처 사정에도 밝다. 유창한 프랑스어, 온화한 태도와 언행도 겸비했다. 무엇보다 조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나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로 불릴 정도로 주군의 신뢰가 두터워 ‘준비된 국무장관’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10개월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개인’ 블링컨의 처신에는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장관’ 블링컨의 업무 능력에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뉴스위크 등이 ‘취임 첫해 레임덕’까지 거론할 정도로 지지율이 떨어진 바이든 행정부의 난맥상이 주로 대외 문제에서 비롯된 탓이다.

아프가니스탄 철군 과정에서 벌어진 혼란, 오커스(AUKUS·미국 영국 호주 안보협의체) 창설 및 이에 따른 잠수함 계약 파기에 대한 프랑스의 반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미중 대면 정상회담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는 보도, 중국과 러시아만 도와주는 꼴이라며 동맹이 반발하는데도 굳이 추진하고 있는 ‘핵무기 선제 불사용(No first use)’ 원칙 등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동맹을 규합하는 능력은 트럼프 행정부 때보다 나아졌으나 이 역시 바이든 행정부에 동조해서라기보다 전 세계 모든 나라를 조공국 취급하며 폭주하는 중국이 싫어서 미국 편을 든 것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국내 정치에 대한 과도한 함몰과 이에 따른 외교 경시를 꼽는다. 바이든 행정부는 워싱턴 기성정치에 신물이 나 트럼프라는 이단아를 찍은 백인 노동계층을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며 국방비를 줄이고 그 돈으로 인프라 투자 확대를 추진하겠다는 소위 ‘중산층 외교’를 표방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대표적 예가 아프간 철군이다. 그냥 내버려두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도는 온데간데없고 서투르고 어설픈 준비로 당초 기대했던 비용 감축 효과를 얻지도 못한 채 미국의 지도력 부재만 보여준 꼴이 됐다.

대통령,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의 잘못도 있겠으나 주무 장관 블링컨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벌써부터 보수 진영 일각에서는 블링컨의 사퇴를 거론한다. 폭스뉴스의 리즈 피크 외교안보 칼럼니스트는 “대통령에게 제대로 된 조언을 할 수 없다면 사임하라. 중국의 도전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국무장관의 약하고 무기력한 지도력을 감당할 수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블링컨의 현주소는 한국을 포함한 미국의 동맹에도 상당한 고민을 안긴다. 기업인에다 워싱턴 정치 경력이 전무한 대통령, 4선 하원의원 출신의 정치인 국무장관이 있었던 트럼프 행정부 시절과 달리 상원의원 36년과 부통령 8년을 외교 전문가로 지냈다고 자처하는 대통령, 외교관 중 외교관으로 불렸던 장관이 등장해도 미국의 외교정책이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는 점은 그 어떤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나온다 해도 미국 우선주의와 동맹 경시 노선이 이어질 것임을 시사한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블링컨은 상원 인준 당시 전체 100표 중 78표를 얻었다. 전임자 폼페이오보다 21표나 더 얻은 것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 무너진 미국 외교를 재건하라는 미국 사회의 기대가 그만큼 높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장관직을 얼마나 더 수행할지는 알 수 없으나 인준 때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환골탈태 수준의 전략 변경과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 같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준비된 국무장관#토니 블링컨#부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