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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국적 불명의 아파트명, 어려워야 있어 보인다?[광화문에서/김유영]

입력 2021-10-09 03:00업데이트 2021-10-0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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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 산업2부 차장
‘디에이치라클라스, 래미안라클래시.’ 최근 입주가 시작된 서울 강남권 아파트 명칭이다. 서초구 디에이치라클라스(The H La Class)는 건설사 브랜드(디 에이치)에 프랑스어 관사인 ‘La’를 썼고 지위나 계급이라는 영어 ‘Class’를 붙였다. 굳이 외국어를 써야 할까 싶지만 그래도 써야 한다면 관사가 프랑스어이므로 명사도 프랑스어 ‘Classe’여야 한다. 강남구 래미안라클래시(Raemian La Classy)는 건설사 브랜드에 ‘세련된’이라는 영어 ‘Classy’를 붙였는데 ‘프랑스어 관사’에 ‘영어 형용사’를 써버렸다. 프랑스어와 영어를 뒤섞은 데다 관사 뒤에 명사 아닌 형용사를 붙였다. 배타적이고 높은 지위에 있는 걸 표현하려는 것 같은데 어법을 보면 어쩐지 민망해진다.

요새 국적 불명의 알쏭달쏭 외국어로 만든 아파트 이름이 난무하고 있다. 블레스티지, 첼리투스, 원펜타스, 리버젠, 루센티아 등 영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와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까지 갖다 붙이며 외국인조차 의아해하는 이름이 봇물을 이룬다.

1990년대 전만 해도 지역이나 건설사 이름을 쓴 아파트가 많았다. 부르기도 기억하기도 쉬웠다. 그러다 분양가 자율화로 건설사들이 아파트를 매력적인 상품으로 소구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자 2000년대부터 롯데캐슬, e편한세상, 래미안, 자이 등 브랜드가 본격 등장했다. 이후 2015년 무렵 여러 건설사가 함께 재건축 재개발하는 경우가 많아지며 아파트명은 ‘고덕래미안힐스테이트’ ‘마포래미안푸르지오’처럼 여러 브랜드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여기에 단지 별칭까지 유행이 됐다. 최대 재건축 단지로 불리는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의 새 이름은 당초 에비뉴포레(Avenue Foret)였다. 숲길을 굳이 영어로 표현했다. 하지만 옆 동네인 송파구 올림픽공원이 가깝다는 걸 강조하자는 의견에 영어인 파크(공원)를 더해 ‘둔촌올림픽파크에비뉴포레’라는 12자의 아파트명이 탄생했다. 이처럼 리버(강), 메트로(역), 에듀(학교), 마리나(바다) 등 아파트 가치를 높여준다는 마법의 영어 단어까지 애용되며 아파트 이름은 장대해졌다. 신규 택지나 신도시라면 ‘이천증포3지구대원칸타빌2차더테라스’, ‘검단신도시2차노블랜드에듀포레힐’처럼 20자에 육박하는 이름이 가능해지는 이유다.

어느 아파트 브랜드 광고에서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고 했던가. 지역별로 집값 격차가 커졌고 같은 지역도 아파트 단지별로 철저히 계급화되는 현실에서 더 나은 곳에 살고 싶은 욕망을 나무랄 수 없다.

하지만 외국인조차 어리둥절해지는 기상천외한 아파트 작명법은 애처롭다. 구축에 살던 주민들이 앞장서 아파트에 새 브랜드 붙이는 게 유행했던 때 HDC현대산업개발은 압구정 현대 주민들에게 현대 아이파크로 바꿔 달라고 먼저 제안했다가 퇴짜 맞았다는 건 흥미롭다. 외국어가 모국어보다 우월할 것이라는 착각, 그 우월함을 내세워 외국어에 익숙지 않은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배제하는 모습이 나는 불편하다. 한글날을 맞이해 개나리 무지개 장미아파트 같은 한국어 아파트 이름을 새삼 떠올려 본다.

김유영 산업2부 차장 ab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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