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윤종)튜브]이상한 노스탤지어가 유혹하는 9월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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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아름다운 햇살과 바람은 뜻 모를 아쉬움을 추억 저편에서 불러내곤 한다. 프랑스 화가 코로의 유화 ‘고독, 비장 마을의 추억’(1866년).
9월의 아름다운 햇살과 바람은 뜻 모를 아쉬움을 추억 저편에서 불러내곤 한다. 프랑스 화가 코로의 유화 ‘고독, 비장 마을의 추억’(1866년).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기억아, 기억아, 뭘 원하느냐 가을은/지빠귀가 단조로운 대기 속을 날게 하고/태양은 지루한 빛을/북에서 바람 불어오는, 노랗게 물드는 숲으로 던지는구나.”(폴 베를렌, ‘네버모어’)

가을이 단조롭거나 지루할 리 없다. 시인은 ‘가을(l‘automne)’과 ‘악센트 없는(atone)’, ‘단조로운(monotone)’으로 압운(押韻)을 맞추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찬연한 색채로 물들어가는 가을날 오후가 어느 순간 악센트 없고 단조로운 상실감으로 심장을 쿵, 내려앉게 만들곤 한다. 살면서 내가 얻으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지금 집이 없는 자’는 마음의 정처(定處) 없음에 불안하다.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이 이런 날 제격이다. 3악장의 달콤한 서주에 이어지는 클라리넷의 솔로는 기억 뒤편의 먼 시간, 흔들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비쳐들던 9월 오후의 햇살을 떠올리게 한다. 4악장, 바이올린을 비롯한 현악부가 펼쳐내는 서늘한 두 번째 주제는 가을의 끝없이 깊고 푸른 하늘, 가슬가슬하니 살갗을 어루만지는 바람을 느끼게 만든다.

중부 유럽의 가을은 궂은날이 많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 중에서 헤르만 헤세의 시에 곡을 붙인 ‘9월’은 비 오는 초가을을 그려낸다. “정원이 애도한다/꽃 속에 찬 빗방울 떨어진다/여름은 가만히/그 끝을 향해 몸을 떤다.”

비가 그치면 9월은 한층 깊어지고 바람은 더 선뜻해질 것이다. 혼자만의 고적함에 잠겨 보고 싶어지는 시간이다. 브람스의 피아노 소품집 작품 118 중 제2곡. ‘간주곡’과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다. 이 작품은 ‘하염없다’는 형용사를 떠올리게 한다. 하염없이 동경하고, 하염없이 소망하고, 하염없이 지샌다. 어디를 향한 것이었던가, 이 작곡가의 하염없음은.

기온이 내려가면 서늘함 속에서 눈을 뜨는 때가 많아진다. 때로는 악몽에 시달리지만 고맙게도 아침의 찬 기운이 잠을 깨워주고, 여느 때와 같은 평온한 하루라는 사실에 안도하게 된다. 포레의 레퀴엠(장송미사곡) 중 아뉴스데이(신의 어린 양)는 그렇게 악몽으로부터 구원의 손길을 건네는 신선한 가을 아침 공기처럼 느껴진다.

때로는 꿈속에 그리운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서운한 얼굴로 헤어진 것 같아서 종일 기분이 좋지 않다. 다시 꿈에 나와서 따뜻한 한마디를 마저 나눠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날엔 엘가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중에서 두 번째 느린 악장을 귓가에 하염없이 흘려보낸다.

가을밤은 외롭다. 마치 어린 시절 우연히 집이 비어서 식구 중 누구든지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유난히 짧아진 해가 능선 너머로 꼴깍 잠기고, 땅거미가 길어지던 그런 저녁나절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은 누구나 외로움과 두려움을 간직하며 사는 존재이지만 이제 떠올리는 노래 속의 주인공은 곧 다가올 불운을 직감하며 더욱 불안과 고독에 휩싸인다.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 중에서 남편의 맹목적인 불신과 질투를 감당하는 여주인공 데스데모나의 아리아 ‘버들의 노래’다.

일상은 때로 마음에 이런저런 생채기를 남긴다. 때로는 위로의 말조차 성가시다. 지나치게 알려지지는 않은 선율 중 하나로 위안을 대신하게 한다면. 낭만주의 중기 작곡가 카를 라이네케의 호른, 오보에, 피아노를 위한 3중주곡 중에서 2악장을 소환한다. 때로 울컥해지기도 하지만, 세 악기는 나지막하게 서로를 다독이며 위안의 메시지를 건넨다.

가을은 누구에게나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권세가 있는 자든 없는 자든, 가진 자든 없는 자든 마찬가지다. 9월 늦은 오후가 배경인 푸치니 오페라 ‘외투’에서 센강 바지선 선장의 아내인 여주인공은 물 위에서의 삶을 따분해하며 어릴 적 살던 동네를 그리워한다.

붉게 기울어진 햇살이 구름 속에서 나타나듯 쨍한 트럼펫의 일성(一聲)이 터진다. 절절한 지난 시절의 그리움으로 불타는 2중창, ‘내 꿈은 달라요’다. “이 갈망, 이 이상한 노스탤지어/저기 파리가 우리를 부르는데. 천 개의 행복한 목소리로 그 끝없는 매혹을 말해주듯이.”

그런 9월이다. 이상한 노스탤지어, 천 개의 목소리가 부르는 매혹이 우리를 마법처럼 꾀는.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노스탤지어#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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