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정복 앞당기려면 ‘뇌 기증’ 문화 확산돼야”[박성민의 더블케어]

박성민 기자 입력 2021-09-04 03:00수정 2021-09-0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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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국내 치매인구 100만명
사후 24시간내 꺼내야 온전히 보존
정부, 내년 ‘태아 뇌은행’ 시범사업
지난달 30일 김인범 가톨릭대 의대 교수가 서울성모병원 뇌은행에서 기증 받은 뇌 조직을 살펴보고 있다. 김 교수는 “뇌 기증은 가족력을 확인하거나 난치 질환의 발병 원인을 밝혀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끝나지 않는 팬데믹이 ‘돌봄’의 방향을 고민하게 합니다. 직장을 잃고 가정이 무너지면서 스스로를 돌보기 버거운 이웃도 늘고 있습니다. 정신건강 관리부터 비대면 의료까지 ‘위드 코로나’ 시대엔 보건의료 패러다임도 달라집니다. 의료와 복지, 일자리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더블케어’가 들여다봅니다.》

60대 전문의 A 씨는 올 초 서울대병원 치매 뇌은행에 사망한 아버지의 뇌를 기증했다. 아버지는 수년간 치매를 앓았다. 아버지의 형제들도 치매와 싸우느라 힘든 노년을 보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슬픔이 컸지만 치매 치료법이 하루빨리 개발되길 바라는 마음이 더 간절했다. 생전 뇌 기증에 동의한 아버지의 뜻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뇌 기증 덕분에 치매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됐다. 뇌 부검 결과 A 씨 아버지는 치매에 걸릴 확률이 일반인보다 19배 높은 유전 요인을 갖고 있었다. 생전에 진단받지 못했던 파킨슨병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1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의학연구혁신센터에서 만난 박성혜 치매 뇌은행장(병리과 교수)은 “유족이 고인의 임상정보까지 제공해 준 덕분에 치매 초기부터 사망까지 질환을 심도있게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7년 간 누적 뇌 기증 300건 미만

한국인에게 뇌 기증은 아직 낯설다. 2014년 한국뇌연구원 산하 국가뇌조직은행(현 한국뇌은행)이 설립됐고, 2016년부터는 국립보건연구원이 치매 뇌은행 네트워크를 운영 중이다. 주무 부처가 각각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질병관리청으로 나뉘어 있다. 7개 병원이 참여 중인 한국뇌은행에는 지난해까지 151명, 4개 병원이 참여한 치매 뇌은행에는 지난달까지 135명이 뇌를 기증했다.

병이 생기면 직접 조직을 떼어 내 검사할 수 있는 다른 인체 기관과 달리 뇌는 생검(生檢)을 거의 하지 않는다. 자칫 뇌 기능을 더 저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치매, 파킨슨병 등 퇴행성 뇌질환은 사실상 사망 후에야 조직 검사를 할 수 있다. 부검이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한국에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다. 연구 자원이 부족하니 질환의 원인 규명이나 치료제 개발은 더딜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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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증하는 치매 인구를 생각하면 뇌 기증은 더 절실하다.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올 2월 기준 60세 이상 치매 추정환자는 86만3542명, 65세 이상의 유병률은 10.3%에 이른다. 이르면 2024년 치매 인구는 1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박 교수는 “뇌 질환 연구를 위한 동물실험 결과는 인간의 뇌에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치매 없는 100세 시대를 위해선 뇌은행의 역할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치매, 파킨슨병 연구할 뇌 조직은 특히 부족”


대개 뇌사자의 장기를 이식하는 장기 기증과 달리 뇌 기증은 사망 후에 이뤄진다. 뇌 조직을 온전히 보존하려면 늦어도 사망 후 24시간 안에 뇌를 꺼내야 한다. 뇌는 다른 장기보다 괴사가 빨리 진행되기 때문이다. 뇌 전문가들은 12시간 내 적출을 권장한다. 생전에 뇌 기증에 서약했지만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유족 동의가 지체돼 뇌 기증이 무산되는 경우도 있다.

뇌를 보관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1.4kg가량인 뇌의 절반은 약 1cm 두께로 잘라 영하 80도 이하의 초저온 상태로 냉동 보관한다. 나머지는 병리학적 진단을 위해 포르말린에 담가 약 한 달간 고정시킨다. 이를 절개와 보존이 쉽도록 파라핀 블록으로 만든다. 그리고 두께 약 4μm(마이크로미터·1μm는 100만분의 1m)의 절편으로 잘라 염색한 뒤 병인 등을 분석한다.

이렇게 만든 뇌 조직은 대학과 연구소 등에 분양된다. 연구의 타당성과 윤리성 등을 심의해 분양을 결정한다. 한국뇌은행이 보유 중인 파라핀 블록은 약 1만5000개. 언뜻 충분한 것 같지만 질환별로 필요한 부위가 달라 뇌 기증자 수는 연구 수요에 비해 부족하다. 류연진 한국뇌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치매와 파킨슨병 연구에 필요한 조직은 해마와 흑질인데 전체 뇌에서 얻을 수 있는 양은 2∼3g에 불과하다”며 “연구 수요만큼 충분히 분양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반드시 뇌 질환이 있어야만 기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건강한 뇌는 대조군으로 활용된다. 현재까지 기증된 뇌의 약 30%는 질환이 없는 뇌다. 김인범 가톨릭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서울성모병원 뇌은행장)는 “다른 질환으로 사망했지만 뇌 부검에서 문제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며 “질환이 없는 뇌도 의학적으로 연구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뇌 기증이 알츠하이머 시작점 규명으로 이어져

선진국들은 일찌감치 뇌은행을 구축해 뇌 질환 정복을 꿈꾸고 있다. 유럽 뇌은행 중 가장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네덜란드 뇌은행은 1987년부터 4500건 이상의 뇌 기증을 받았다. 일본은 1967년 개소한 니가타대 뇌연구소에서만 3500개 이상의 전뇌를 확보해 연구 중이다. 류 선임연구원은 “일본은 모든 장기를 함께 기증받고 있어 여러 질환과 뇌의 연관성을 연구하기에도 유리한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뇌 연구로 가장 주목받는 나라는 브라질이다. 2003년 뇌은행을 설립한 브라질은 정부가 사망자의 부검을 의무화하면서 뇌 조직 확보가 용이해졌다. 상파울루대는 세계 최대 규모의 뇌은행이다. 김 교수는 “브라질 연구진이 알츠하이머가 뇌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도 다양한 뇌 조직을 연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약 1000억 개의 신경세포(뉴런)가 활동하는 뇌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뇌 자원 확보와 투자만 뒷받침되면 삶의 질을 높이는 연구 성과를 기대할 여지가 크다. 의학계에서는 조현병과 각종 중독 등 정신질환도 뇌 기증을 통한 연구가 필요한 분야로 본다. 문제는 뇌의 확보다. 류 선임연구원은 “본인이나 가족의 동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정신질환을 앓은 뇌는 특히 기증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내년 ‘태아 뇌은행’ 추진…신경 발달 이상 연구

서울성모병원 뇌은행이 보관 중인 뇌 조직 슬라이드.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한국은 질병의 치료에 있어서는 의료 선진국으로 손꼽히지만 뇌 연구는 후발주자다. 의료계에선 한국의 뇌 연구 역량을 선진국의 70% 수준으로 평가한다. 특히 뇌 연구의 바탕이 될 뇌 기증과 뇌은행 구축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시신 기증은 장례를 치른 후에도 가능하지만 뇌 기증은 사망 후 바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거부감이 더 큰 측면도 있다.

뇌은행 출범 후 꾸준히 증가하던 기증 희망자도 최근 감소 추세다. 치매 뇌은행의 기증 희망 서약은 2019년 341건에서 지난해 211건, 올해는 8월까지 104건으로 줄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홍보가 부족했던 영향도 있다. 김 교수는 “기증 등록 후 실제 기증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며 “올해 서울성모병원의 뇌 기증 5건도 시신 기증 희망자가 뇌 기증까지 결심한 경우”라고 말했다.

내년부터는 뇌은행 운영과 연구를 심화시키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한국뇌은행은 내년부터 ‘태아 뇌은행’ 시범사업을 계획 중이다. 신경 발달 이상으로 인해 성장에 이상이 생긴 태아 연구를 위해서다.

뇌 연구 성과를 높이려면 의료 데이터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사후 뇌 조직 확보에 그치지 않고 발병부터 사망까지 임상 기록을 얻게 되면 더 과학적인 연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뇌은행 소속의 한 교수는 “의료 기록은 유족만 열람과 확보가 가능한데, 뇌은행이 직접 접근할 수 있어야 유족의 불편함을 줄이고 연구 성과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최근 뇌 기증에 대해 문의하는 30, 40대 젊은층이 많아졌다”며 “장기 기증이 당장 내 곁의 생명을 살린다는 의미가 있다면 뇌 기증은 다음 세대의 무수한 생명을 살리는 소중한 나눔”이라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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