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는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김기용 기자의 우아한]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15일 15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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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한국보다는 오히려 중국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이달 초 한국의 한 소방안전 관련 협회가 주한 미군 및 미국에서 바이러스 등을 연구하는 미군 기지 ‘포트 데트릭(Fort Detrick)’을 상대로 부산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입니다. 이 협회는 주한 미군이 2017~2019년 한국법을 무시하고 독성물질을 한국에 반입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작은 단체들이 주목을 받기 위해 주요 이슈를 따라가며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또 소송 자체가 워낙 많기 때문에 이런 뉴스들이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다릅니다. 중국에서는 단체들이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도 드물뿐더러 특히 정부나 공공기관 등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군을 상대로 소송한다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중국인들의 눈에 미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소장에 폴 러캐머라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민군사령관 이름을 적시했다는 것이 상당히 큰 뉴스로 받아들여진 것 같습니다. 특히 중국인들의 큰 관심을 끌었던 것은 미군 기지 ‘포트 데트릭’이라는 이름이 소송에 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군사기지 포트 데트릭. 바이두 캡쳐
미국의 군사기지 포트 데트릭. 바이두 캡쳐


●중국인 2500만 명, ‘포트 데트릭’ 조사 요구에 서명
포트 데트릭은 미국의 생물학 무기 연구, 생산으로 유명한 군사기지입니다.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이 군사기지가 중국에서는 이미 가장 유명한 이름이 됐습니다. 많은 중국인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미군기지 포트 데트릭 내 미국 육군전염병의학연구소(USAMRID)에서 만들어졌고 유출됐다는 이 주장은 지난해부터 중국 정부 관계자들과 관영 매체가 반복적으로 제기해오고 있습니다.

최근 중국 정부는 외교사절과 선전기구 등을 총동원해 세계보건기구(WHO)가 미군 실험실을 조사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등 이 주장을 한층 더 세게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중국중앙(CC)TV는 8월 1일 ‘포트 데트릭의 어두운 내막’이라는 제목으로 30분짜리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이후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 관련 해시태그가 주요 이슈 상단에 오르고 동영상 조회수가 4억 2000만을 기록하는 등 중국 누리꾼들의 높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중국 관영 매체 글로벌타임스가 진행한 ‘WHO의 포트 데트릭 실험실 조사’를 요구하는 서명 운동에는 약 2500만 명이 서명했습니다. 한국으로 따지면 전체 인구 가운데 절반이 서명에 참여한 셈입니다.

올해 2월 중국 우한 등을 조사한 WHO 조사단이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당시 조사단은 “중국 실험실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출됐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밝혔다. 바이두 캡쳐
올해 2월 중국 우한 등을 조사한 WHO 조사단이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당시 조사단은 “중국 실험실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출됐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밝혔다. 바이두 캡쳐
중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라고 불렀던 것을 비꼬아 ‘미국 바이러스’라고 명명하는 추세가 늘고 있습니다. 중국 보건당국 고위관계자들은 WHO가 2월 우한 등을 현지 조사한 후 3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코로나19가 중국 실험실에서 유출됐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밝힌 점을 인용하며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중국을 코로나19 바이러스 기원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상식과 과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중국 정부 역시 코로나19의 ‘우한 실험실 유출설’에 대해 단호히 반박하며 미국이 코로나19 기원 문제를 정치화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미군 실험실 유출설’을 주장하며 공세에 나서고 있습니다. 자오리젠(趙立堅)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미 몇 차례 WHO에 포트 데트릭에 있는 실험실 조사를 촉구했습니다. 또 2019년 미군들이 우한에서 열린 세계군인체육대회에 참가하면서 중국에 바이러스를 들여왔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2019년 중국 우한에서 열린 세계군인체육대회에서 미군 선수단이 입장하는 모습. 중국중앙(CC)TV 화면 캡쳐
2019년 중국 우한에서 열린 세계군인체육대회에서 미군 선수단이 입장하는 모습. 중국중앙(CC)TV 화면 캡쳐


●서방 국가들 ‘中우한 실험실 유출’ 굳게 믿어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중국 우한에 있는 바이러스 실험실에서 코로나19가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올해 초 WHO의 발표가 있긴 했지만 보고서에 의문을 품으며 중국이 완전한 원본 데이터를 주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WHO의 조사와 관계없이 미국 정보당국에 코로나19 기원을 추가 조사해 90일 이내 보고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또 WHO의 조사팀과 함께 우한을 방문한 덴마크 과학자 피터 벤 엠바렉은 WHO의 공식 발표와 달리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우한 연구소에서 유출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는 덴마크 국영 TV2와 인터뷰에서 당시 조사팀이 우한 질병통제예방센터(우한CDC) 연구시설에서 더 많은 정보를 찾아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우한 연구소가 이전한 시점과 바이러스 유출 시기가 겹치는 점이 실험실 유출설의 근거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연구실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바이러스가 새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올해 2월 WHO 조사단의 중국 우한 바이러스 연구소 방문 과정에서 중국 정부 관계자들이 주변을 통제하고 있다. 바이두 캡쳐
올해 2월 WHO 조사단의 중국 우한 바이러스 연구소 방문 과정에서 중국 정부 관계자들이 주변을 통제하고 있다. 바이두 캡쳐

●과학적, 객관적 관점 필요
이쯤 되면 미국이나 중국의 주장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핵심적인 증거나 단서도 없이 서로 상대방 실험실에서 바이러스가 유출됐다고 주장하는 모습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기원은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은 물론이고 바이러스 학자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을 부르고 있습니다. 또 미 정보당국 내에서도 실험실 유출이냐, 아니면 박쥐 등 자연 상태에서 인간에게 전염된 것이냐를 두고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자연발생설에 무게를 싣고 있어 보이지만, 미중 패권 다툼 와중에 과학적 증거와 객관적 시각은 힘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 세계를 혼란에 빠트리고 인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대사건 앞에 미국과 중국은 서로를 비난하며 상대방 흠집 내기에 여념 없습니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할 WHO와 같은 국제기구도 힘의 논리에 따라 기우뚱거리는 상황입니다. 한국도 미국과 중국의 대결 사이에서 갑자기 소환 당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의 삶을 어떻게 하면 원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느냐 입니다. 이를 위해 코로나19 기원 조사가 필수라고 한다면 힘의 논리를 배제하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조사와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한국이 일관되게 견지해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베이징=김기용 특파원 k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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