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핵공격 카운트다운 영상 속 입금 요구하는 女 정체는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8일 17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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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버 ‘체리장’ 연기한 류성실 작가




남한 한복판에 북한이 쏜 핵미사일이 떨어지기 5분 전. 카운트다운 시작과 함께 영상에는 경극배우처럼 얼굴을 하얗게 칠한 정체불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BJ ‘체리장(Cherry Jang)’. 스스로 ‘한민족 평화통일 홍보대사’ ‘일등시민’ ‘FBI 국가비상사태 자문위원’이라고 칭하는 그는 “오빠들도 얼른 대피하셔야 한다”며 “이제 천국 시민이 될 준비를 하셔야 한다”고 말한다. 얼마 뒤 은행 계좌번호를 슬며시 자막으로 띄운 그는 “오빠들이 아래 계좌로 돈을 저축하셔야만 천국에서 쓸 금은보화를 저축할 수 있다”며 천연덕스럽게 입금을 요구한다. 카운트다운 시계가 0초가 된 순간, 조잡한 그래픽으로 꾸며져 있던 화면은 온통 검게 변하며 영상은 끝난다.






영상을 보고 나면 그야말로 뇌가 찌릿찌릿해진다. 시청자들도 “내 정신도 이상해진다. 아무 것도 못하겠다”며 댓글로 감상평을 적었다. 2018년 말 홀연히 영상으로 나타난 체리장은 천국에서 먼저 일등시민이 된 본인의 소식을 2020년 12월 마지막 영상을 통해 전하며 현재 자취를 감췄다. 이 영상은 도대체 뭐고, 체리장은 누굴까.

먼저 정체부터 밝히자면 시리즈 영상을 기획하고 직접 체리장을 연기한 건 미술작가 류성실(29·여)이다. 올해 3월 에르메스 재단은 19회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수상자로 역대 최연소인 류 작가를 선정했다. 유튜브에서 그가 펼친 ‘1인 미디어 쇼’를 높이 사 신선한 예술로 인정한 것. 온라인에서는 체리장을 ‘숭배’하는 열성 팬덤까지 생기고 사칭 SNS 계정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류 작가의 예술 세계에 환호하는 이가 늘고 있다. 체리장을 실존 인물로 착각해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는 저를 구원해달라”는 장문의 편지를 보낸 이도 있다고.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체리장의 본체’ 류 작가는 “실험적으로 도전한 영상에 이렇게 많은 분이 반응하고 좋아해주실 줄 몰랐다”며 “젊은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위해 최대한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는 플랫폼인 유튜브에서 예술실험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K-키치’라고 불릴 만큼 토속적 가치나 가부장적 권위를 비틀어 해석한다. 1인 미디어 세태, 음모론, 구시대적 가치 등이 모두 그의 풍자 대상이다. 평소 “이 사람은 왜 이러지?”라고 류 작가가 느끼게 만든 여러 경험들이 예술적 소재가 되기도 한다. “실체 없이 뜬구름 잡는 예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는 여러 영상, 전시에서 체리장을 비롯한 흥미로운 캐릭터와 구체적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그간 일민미술관, 북서울미술관, 백남준 아트센터서 선보였던 전시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유튜브서 ‘체리장’ 이라는 부캐를 만들어 독특한 ‘1인 미디어쇼’ 펼친 류성실 설치미술가(28) 인터뷰. 사진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유튜브서 ‘체리장’ 이라는 부캐를 만들어 독특한 ‘1인 미디어쇼’ 펼친 류성실 설치미술가(28) 인터뷰. 사진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그가 유튜브 작업에 발을 들인 건 승부수이기도 했다. 젊은 미술가, 조각가, 아티스트로서 상대적으로 설 곳이 좁은 미술 판에서 이름을 알리고, 작품성을 증명하고 싶었다. “딱 3년만 해보겠다”며 부모님을 설득했다. “예술을 수치로 증명하긴 어렵잖아요. 어려서부터 원했던 상을 받으면서 제 가능성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뻐요.” 지난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오프라인 전시가 어려워지면서 영상 작업에 더 집중하는 시간이 됐다.

유튜브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그는 이색적이고 차별적 영상을 만들기 위해 구글에서 무작정 ‘이국적(exotic)’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며 이미지를 찾았다. 그의 영상에서처럼 촌스럽고 조악한 그래픽이 덕지덕지 붙은 영상은 불편함마저 느끼게 한다. 전부 류 작가가 의도한 감성이다. “기성사회의 노골적이고 천박한 마케팅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거든요.” 여기에 그가 읽고 연기할 대략적 스크립트를 만들고 조명 설치와 분장까지 마치고 나면, 그의 쇼를 시작할 준비는 끝난 셈이다. 그는 “저도 모르게 제 안에서 체리장의 모습이 나온다. 내가 흑화 했을 때 나오는 모습을 과장해서 연기했다”고 털어놨다.

영상 속 체리장 캐릭터 설정 상 그는 현재 ‘하늘나라’에 있다. “하늘나라에서 먼저 일등시민이 됐으니 여러분도 나를 믿고 따라오라”는 메시지가 마지막이다. 팬들은 지금도 “언제 돌아오시는 거냐”며 다음 영상을 갈구하고 있다. 류 작가가 답했다. “여러분들, 체리장은 절대로 공짜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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