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파 잡겠다고… 루카셴코, 전투기 띄워 여객기 강제착륙시켜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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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루스의 ‘유럽 최후 독재자’
그리스發 리투아니아行 여객기에 “기내 폭발물… 민스크에 착륙하라”
관제센터 거짓말… 항로 변경시켜 반정부 시위 주도 26세 언론인 체포
美 등 “사실상 하이재킹… 제재 촉구”

23일 저녁 아일랜드 항공사 라이언에어 소속 여객기가 목적지인 리투아니아 빌뉴스 공항에 약 7시간 늦게 도착한 모습(위쪽 사진). 이 여객기는 이날 오후 리투아니아와 국경을 접한 벨라루스 정부에 의해 수도 민스크 공항에 잠시 강제 착륙하고 오는 바람에 도착이 늦어졌다. 27년째 장기집권 중인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이 여객기에 탑승한 반정부 언론인 로만 프라타세비치를 체포하기 위해 전투기까지 동원해 사실상의 항공 납치를 자행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빌뉴스 공항의 여성 2명이 루카셴코 정권에 항의하기 위해 ‘내가 프라타세비치다’라는 팻말을 들고 있다. 빌뉴스=AP 뉴시스
23일 저녁 아일랜드 항공사 라이언에어 소속 여객기가 목적지인 리투아니아 빌뉴스 공항에 약 7시간 늦게 도착한 모습(위쪽 사진). 이 여객기는 이날 오후 리투아니아와 국경을 접한 벨라루스 정부에 의해 수도 민스크 공항에 잠시 강제 착륙하고 오는 바람에 도착이 늦어졌다. 27년째 장기집권 중인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이 여객기에 탑승한 반정부 언론인 로만 프라타세비치를 체포하기 위해 전투기까지 동원해 사실상의 항공 납치를 자행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빌뉴스 공항의 여성 2명이 루카셴코 정권에 항의하기 위해 ‘내가 프라타세비치다’라는 팻말을 들고 있다. 빌뉴스=AP 뉴시스
28년째 집권 중인 ‘유럽 최후의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67)이 자국 공군 전투기를 띄워 비행 중이던 다른 나라 여객기를 강제로 착륙시켰다. 이 여객기에 타고 있던 반체제 인사를 체포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두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국가가 자행한 ‘하이재킹’(운항 중인 항공기를 공중에서 납치하는 일)이라고 했다. 유럽연합(EU)과 미국 등 국제사회는 테러와 다름없다고 비판하며 벨라루스에 대한 제재 의사를 내비쳤다. 루카셴코의 뒤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있어 이번 사태가 서방과 러시아의 대결로 옮아갈 가능성도 있다. 옛 소련 국가로 러시아 경제 의존도가 높은 벨라루스는 1999년 러시아와 ‘연합국가’ 창설 조약을 맺고 국가 통합을 추진해 왔다.

BBC 등에 따르면 2019년부터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을 오가며 텔레그램 메신저에서 반(反)루카셴코 채널 ‘넥스타 라이브’를 운영해온 언론인 로만 프라타세비치(26)는 23일 아일랜드 항공사 라이언에어 여객기를 타고 그리스 아테네에서 리투아니아 빌뉴스로 향했다. 빌뉴스는 벨라루스 국경에서 가까운 곳이다. 항공기는 리투아니아 영공에 접어들기 불과 수분 전 갑자기 방향을 틀어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 내렸다. 루카셴코 정권이 12개국, 171명의 승객이 탄 이 여객기를 소련제 ‘미그-29’ 전투기까지 출격시켜 자국 땅에 강제로 착륙시킨 것이다. 여객기에 폭발물이 설치돼 있어 보안검사가 필요하다면서 비상 착륙을 요구했다.

프라타세비치는 출동한 경찰에 체포됐다. 일부 벨라루스인과 러시아인도 민스크 공항에 억류된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승객들은 원래 목적지인 빌뉴스에 당초 예정 시간보다 7시간 늦은 이날 오후 9시 25분경 도착했다. 도이체벨레 등에 따르면 일부 탑승객은 프라타세비치가 “탑승 전부터 미행을 당했고 (귀국하면) 사형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벨라루스 야권 인사들은 루카셴코 정권이 이 여객기에 “비상 착륙하지 않으면 격추하겠다”고 협박했으며 모든 과정이 루카셴코의 직접 지시로 이뤄졌다고 비판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 등은 즉각 “용납할 수 없는 불법행위로 벨라루스에 책임을 묻겠다”고 비판했다. EU는 25일까지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리는 회원국 정상회의에서 벨라루스 제재 문제를 논의한다.

소련 시절 집단농장 관리인을 지낸 루카셴코는 1991년 벨라루스가 소련에서 독립한 직후 반부패 운동가로 활동했다. 1994년 첫 자유선거에서 초대 대통령에 뽑혔고 헌법을 고쳐 연임 제한을 없애고 집권을 이어왔다. 소련 정보기관 KGB 같은 비밀경찰 조직을 이용해 야당과 언론을 탄압했고 최근 장남 빅토르(47)에게 권력 세습을 시도하고 있다. 루카셴코는 지난해 대선 부정 항의 시위 당시 수차례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의 지지를 호소했다. 이번에도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루카셴코는 지난해 8월 대선에서 80%의 지지율로 압승했다. 당시 950만 인구 중 약 20만 명이 거리로 몰려나와 “광범위한 부정선거가 이뤄졌다”고 항의했지만 최루탄, 물대포 등으로 진압하는 당국을 이길 순 없었다. 이 과정에서 당국 탄압을 피해 주요 야권 지도자가 줄줄이 망명했다. 2015년 벨라루스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명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73) 역시 독일로 떠났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루카셴코#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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