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피해자인 네 잘못이 아니야”[동아 시론/임명호]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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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안정감-자존감 완성되는 시기
친구에게 받은 혹독한 고통 평생 괴롭혀
지금이라도 무능한 사회 시스템 개선해
상처 치유하고 자아 사랑할 수 있게 도와야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
대학병원에서 소아청소년 정신과 의사로, 학교에서 학교폭력위원으로 피해자들을 만나왔다. 임상에서 학교폭력으로 인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 혹은 우울증 환자를 보면서 느낀 경험이 하나 있었다. 주변의 다른 전문가들도 모두 공감하는 내용이었는데, 바로 ‘외상후스트레스 증상이 왜 이렇게 심각하고, 치료를 해도 오래 지속되는 것일까?’이다. 그래서 고백하자면 ‘혹시 꾀병이 아닐까?’ 하고 의심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피해자들의 증상이 나아지기는커녕 5년, 10년 동안 점점 더 고통이 심해져서 아예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목격했다. 동굴 생활처럼 칩거하거나, 급기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를 상당수 보게 되면서 폭력의 후유증이 한 사람의 인생을 파탄에 이르게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한 연구에 의하면 학교폭력 피해자의 11.7%가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다고 한다. 학폭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초래되면 괴롭힘을 당한 장면들이 계속 떠올라 꿈에서도 나오고 심하면 낮에도 플래시백처럼 환시로 나타나기도 한다. 괴롭힘을 당했던 장소를 피할 뿐만 아니라 당시 알고 지내던 학교 동창들도 피하게 된다. 학폭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폭이 주로 나타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중·고등학교 시기는 뇌 전두엽 등 중요한 뇌 발달이 왕성하게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정서적 안정감, 자존감 등이 만들어지는 매우 취약하고 결정적인 시기다. 그래서 그 후유증이 엄청난 것이다.

임상에서 경험한 학폭 피해자들은 대체로 마음이 여리고 순박하고 다소 고지식한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춘 시절에 만난 친구들은 평생 가져갈 소중한 추억이 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이제 사회생활을 준비하려는 출발점에서 마음 약한 그들은 갑작스럽게, 되돌릴 수 없을 만큼의 혹독한 고통을 친구들로부터 받게 된다. 이들은 ‘세상은 힘이 없으면 모멸과 수치를 당해야 하는 정글과 같은 곳이며,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못하는 곳이구나. 나는 그저 무력하게 버티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왜 그렇게 오랜 기간 주변에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을까. 피해자들은 ‘학습된 무력감’을 갖게 되므로 오랫동안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다. 이들은 ‘폭력을 당했을 때처럼 앞으로도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거야’라고 스스로 체념하고 포기한다. 또한 피해자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을 갖게 되는데, 특히 학폭이 어린 시기에 일어날수록 ‘내가 혹시 잘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라고 자책하게 된다. 가해자들도 ‘네가 잘못해서 폭력을 쓸 수밖에 없었다’라고 순진한 피해자의 탓으로 떠넘기는 ‘가스등 효과’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네가 느려서, 우리 조의 수행평가 성적을 떨어뜨렸기 때문에 충고한 거야”, “규칙을 안 지켜서, 반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강압적인 행동이 조금 필요했어”처럼.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에서 좌절감에 잠겨 있는 주인공에게 심리전문가는 “너의 탓이 아니야”라고 반복해서 말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많은 학폭 피해자들이 ‘그때 나는 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을까’라고 후회하기도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학교폭력은 당신의 탓이 아니다. 학교폭력은 당신이 그때 그렇게 혹독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지만 장난처럼 무시하고 숨기기에 급급했던 어느 친구, 부모님, 선생님, 경찰의 잘못이고 무능한 사회 시스템의 잘못인 것이다.

아직도 세상에 아픔을 드러내지 못하는 당신에게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는 작은 방법을 하나만 소개하자면, 오늘부터 하루 30분 정도라도 자신을 위로하고 자신에게 선물하는 취미 활동을 시도해 보기를 바란다. 좋아하는 동영상, 음악을 반복해서 시청하거나, 좋아하는 음식을 시켜서 천천히 먹기 등. 그리고 가끔씩이라도 카톡을 보낼 사람을 꼭 정해서 간단한 안부 인사라도 하길 바란다. 혹시 가능하다면 그 아픔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떤 이들은 “10년이나 지난 과거 일을 왜 하필 지금에야 꺼내느냐”고 묻는다. 10년 동안이나 우리 사회는 피해자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못했다. 지금 그들은 여전히 아프지만 재외상화(在外傷化)의 위험을 무릅쓰고 피해 사실을 용기 있게 꺼내놓고 있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도와주지 못한다면 오늘은 다시 10년이 지나 바로잡지 못한 아픈 과거가 될 것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


#학교폭력#피해자#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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