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브랜드가 부담스럽게 된 이유[오늘과 내일/고기정]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30일 03시 00분


코멘트

정책마다 중구난방 붙이는 K시리즈
‘국뽕’ 강요하는 과거의 그림자 연상

고기정 부국장
고기정 부국장
브랜드를 가장 빨리 망치고 싶다면 온갖 것에 그 이름을 갖다 붙이라는 말이 있다. 마케팅에선 일종의 법칙 같은 격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20세기 후반 미국 맥주시장이다. 밀러맥주는 밀러라이트 밀러드래프트 밀러레귤러 등 타깃 수요층과 제품 성격이 다른데도 죄다 밀러를 붙였다. 결과는 “도대체 밀러는 무슨 맥주였지?”라는 반응이었다. 브랜드의 힘은 그 범위에 반비례한다. 초점을 좁힐수록 강해진다.

K로 시작하는 우리나라 국가 브랜드도 그렇다. K팝은 브랜드 정체성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케이스다. K드라마, K패션, K뷰티, K무비…, 다소 과도한 확장성을 보이긴 했지만 평가가 나쁘진 않았다. 제품의 질이 받쳐줬기 때문이다. 종종 봐왔던 경우지만, 정부가 이 성과에 올라타게 되면서 상황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갔다. K유니콘은 중소벤처기업부가 만든 브랜드다. 기업가치 1조 원 이상인 토종 스타트업을 키우겠다며 내건 이름이지만 이를 이해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K뉴딜, K스마트물류, K포레스트(산림청) 등 온통 K 일색이다. K방역이 나오면서부터는 아예 K자 자체에 염증을 느낀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전형적인 브랜드 거부 현상이다.

이유는 다층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게다. 그럼에도 근인(根因)을 꼽으라면 제품 홍보가 아닌 정권 홍보를 위해 브랜드를 사유화한 때문이다. 제품이라고 할 만한 ‘정책 성과’는 실체가 모호하거나 대중의 구매욕을 자극하기에 역부족임에도 이를 민간이 자발적으로 구축해 놓은 브랜드 체계에 구겨 넣어 강매하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동안 K브랜드가 국내에서 먹혔던 건 ‘시민화한 국가주의’와 결합한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박정희 시대의 국가주의는 국권 강탈의 경험과 기억으로 인한 국가에 대한 보상적 집착, 일제강점기 때 내면화한 파시즘적 국가관, 남과 북 중 오직 남한만이 민족을 온전히 대표해야 한다는 분단국가주의가 응축된 형태였다. 시민화한 국가주의는 이런 식의 과거 유산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아도 국가적 성취를 각 개인이 집단적으로 소유하되 소유의 과정과 결과는 민주적이고 공화적이다. 그래서 평소 자유주의를 지향한다는 사람도 K팝의 성공 소식을 접하면 시쳇말로 ‘국뽕이 돋는다’며 울컥하는 거다.

정부발 K 시리즈는 태생적으로 이런 식의 감정선을 건드리지 못한다. 성취의 과정과 결과에서 개인이 소외된 때문이다. 걸핏하면 정부 정책에 죄 없는 K를 붙여놓고 자화자찬하는데, 이를 접한 개인이 자발적 감정과잉 상태로 이어지긴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정부가 K 브랜드를 남용하며 국뽕을 강요하는 것을 보면 국가의 폭력과 싸워오며 성장한 지금의 집권세력이 역설적으로 과거 국가주의의 그림자 안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정치학자인 서강대 강정인 교수는 개발연대 당시를 국가민족주의로 규정하고 ‘국가=민족=최고 지도자’라는 삼위일체적 결합을 공식화함으로써 독재를 정당화했다고 분석한다. 이를 위해 동원된 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선전선동이다. 정부발 K 시리즈를 독재와 직결(直結)할 순 없겠으나 방법과 목적이 다르다고 하긴 어렵다. 최고 지도자가 특정 정치세력으로 대체됐을 뿐이라는 인상을 준다.

광고학에선 ‘가장 좋은 상품이 가장 좋은 광고’라고 한다. 형식이 본질을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좀 더 세련되고 솔직해졌으면 좋겠다. 그게 민간이 애써 키워온 K 브랜드를 망가뜨리지 않는 길이다.

고기정 부국장 koh@donga.com
#브랜드#정책#중구난방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