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봄 우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오늘과 내일/박용]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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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역 ‘성공의 덫’에 빠져 백신 확보 늦어
‘백신 없는 겨울’ 방역대책엔 실기 없어야

박용 경제부 차장
박용 경제부 차장
7월 중순 미국 뉴욕 브루클린다리에서 마주한 맨해튼 야경은 스산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퍼지며 관광객들로 붐비던 다리는 인적이 끊겼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화려한 불빛을 내뿜던 맨해튼 마천루는 재택근무로 직원이 줄고 주민들이 떠나자 빛을 잃었다.

“이번 여름 우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날 브루클린에서 공사장 벽에 분필로 쓴 낙서를 보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코로나19로 하루에 수백 명씩 사망자가 나오던 지난봄 뉴욕 시민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두려움의 시간을 보냈다. 정부와 정치인이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지 않으면 벌어지는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30만 명의 코로나19 사망자를 낸 미국의 방역 실패는 자만이 부른 ‘인재’였다. 선거를 앞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확산 초기 ‘미국이 전염병 방역 경쟁력 1위’라는 조사 결과를 흔들며 “미국은 안전하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최고라던 미 질병관리본부(CDC)는 코로나19 진단키트조차 제때 보급하지 못해 전염병 대응의 기초인 추적과 격리조차 수행하지 못했다.

세계 최고라던 미국 의료 시스템도 밀려드는 환자 앞에서 힘없이 무너졌다. TV에선 증상이 심각하지 않으면 병원에 오지 말라는 안내방송까지 나왔다. 마스크조차 부족해 당국은 ‘얼굴가리개’를 써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였다. 에볼라 바이러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를 막아낸 미국의 성공 경험은 코로나19를 과소평가하고 신속한 대응을 막는 ‘성공의 덫’이 됐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마저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선거에서도 졌다.

한국은 1, 2차 확산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백신 확보에 뒤처지면서 미국처럼 ‘성공의 저주’를 피하지 못한 모습이다. 정부는 “(백신을) 먼저 접종하는 국가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한두 달 관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지만 백신을 확보해놓고 신중하게 접종하는 것과 없어서 맞지 못하는 건 다른 문제다.

세계는 이미 ‘포스트 백신’ 시대로 가고 있다. 미국 기업들은 백신을 접종한 사람만 출근을 하게 하는 방안을 거론하고 프랑스는 백신을 접종하지 않으면 대중교통과 공공시설을 제한하는 법안까지 준비하고 있다. 미국이 내년 4월 누구나 백신을 맞을 수 있는 ‘백신 오픈 시즌’에 들어가면 백신 접종, 항체 형성, 음성 여부가 공공시설, 대중교통은 물론 세계를 오갈 수 있는 통행증이 되는 ‘백신장벽’ 시대가 올 수도 있다.

백신 확보만큼 ‘백신 없는 겨울’ 방역도 중요하다. 정부가 백신 확보에 전력을 기울여도 현재로선 백신이라는 외투 없이 올겨울을 나야 할 형편이다. 바이러스에 취약한 노약자와 집단 요양시설의 감염을 막아 중환자실 입원율과 사망률을 낮추고 의료 인프라 붕괴를 막는 ‘수직적 거리 두기’와 역학조사 인력 확충, 병상 확보 및 생필품 공급 체계 등 겨울방역 대책을 재점검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 한다. 백신을 맞지 않고 일하는 의료진과 필수 인력에 대한 지원책이 충분한지도 점검해야 한다.

걱정스러운 건 아직도 방역에 집중하지 못하는 정치권의 모습이다.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정부가 공공의대 문제로 의료진, 의대생과 각을 세우고 실업의 1차 저지선인 기업을 개혁 대상에 올려놓는 건 다른 나라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내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서려는 정치인들에게서 정권 심판이나 권력 연장의 의지는 꿈틀대지만 바이러스 위협에서 도시와 시민을 보호하겠다는 결기와 약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내년 봄 우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정치인들과 정부가 심기일전해 답할 차례다.

박용 경제부 차장 parky@donga.com
#봄#사랑#성공의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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