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를 밟으며 얼음을 예측하는 지혜[Monday DBR]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9일 03시 00분


코멘트
주역은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변화를 탐구하고 예측하는 학문이다. 실제로 주역의 본질적 의미는 해(日)와 달(月)을 상징하는 한자가 합쳐져 변화를 뜻하는 ‘바뀔 역(易)’ 자에 담겨 있다. 서양에서 주역을 ‘변화의 책(Book of Change)’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주역 점을 치는 것은 지나간 시간인 과거를 돌아보면서 다가오는 시간인 미래를 예측하는 행위다. 여기서 방점이 찍히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주역의 점괘를 구성하는 효(爻) 가운데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는 효를 변효(變爻)라 하는데 주역에서는 이 변효를 중심으로 미래를 예측한다. 효(爻)라는 글자는 모양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주역 점을 칠 때 사용하던 산(算)가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긴 막대기 하나(―)로 된 것을 양효라 부르고, 작은 막대기 두 개(--)로 된 것을 음효라 부른다. 이것은 주역의 기본 원리가 되는 동양의 음양 이론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음양 이론에서는 팽창하려는 기운이나 에너지를 양이라 정의하고 이를 억제하려는 반대편의 속성을 음이라 정의한다.

만물은 예외 없이 두 가지 속성을 가진다. 대소, 장단, 고저, 냉온, 남녀, 홀짝, 전후, 좌우 등에서 보듯이 하나의 속성이 있으면 그 반대편의 속성도 반드시 존재한다. 이런 단순한 원리를 기반으로 우주 만물의 생성 변화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주역이다. 양효(―)와 음효(--)는 0과 1로 구성되는 이진법과 수학적 원리가 같다.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변화가 씨줄과 날줄이 돼 삶을 다양하게 직조하고 채색하지만 일상에 묻혀 살다 보면 그러한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다. 기업을 경영하는 최고경영자(CEO)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날그날의 매출 실적이나 자금 사정 등에 매몰되다 보면 변화에 대한 대처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뒤늦게 변화를 인지하고 분주하게 움직여보지만 떠나버린 버스를 잡을 수는 없다. 기업과 국가 등 거대 조직의 흥망성쇠에는 예외 없이 이러한 법칙이 적용된다. 외부 환경의 변화에 둔감한 조직은 도태되고 변화를 기민하게 포착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조직은 흥한다.

대우그룹은 글로벌 기업 환경의 변화와 권력 질서의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 빌미가 돼 한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변화를 알아차리고 대응책을 강구하기 시작했지만 공룡 조직의 난파를 피할 수는 없었다. 조선시대 선조와 고종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다가 국권을 빼앗겼다.

경영은 변화의 예술이다. 섬세한 촉각으로 시장의 변화를 주시하고, 분석하고, 예측할 때 기업 경영을 예술적 수준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트렌드를 뒤에서 좇아가는 후발 기업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변화와 시장의 흐름을 주도하는 선진적인 기업이 될 수 있다.

주역은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하는 힌트를 한 가지 준다. 조짐, 전조, 기미에 관한 힌트인데 주역 64괘 가운데 두 번째 괘인 중지곤괘에서는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에 이른다(履霜堅氷至)’라는 메시지로 이를 표현한다. 기업이나 사회 조직에 큰 변화가 몰려오기 전에는 반드시 그것을 예감할 수 있는 전조 현상이 나타난다. 그것을 잘 간파해서 대처하면 변화의 흐름에서 도태되지 않고 그 날개 위에 능동적으로 올라탈 수 있다.

제프 베이조스는 한때 잘나가던 맨해튼의 금융 전문가였다. 하지만 어느 해 인터넷의 사용량이 3000배 가까이 급증하는 것을 보고 안정된 직장을 떠나 실리콘밸리로 향한다. 변화의 조짐을 예민하게 간파한 베이조스는 온라인에 기반한 서점을 시작으로 모든 상품을 온라인에서 거래하는 이른바 ‘에브리싱 스토어’를 구축했다. 오늘날의 아마존은 서리를 밟으면서 직감적으로 굳은 얼음을 예감한 변화 전문가 베이조스가 만들어낸 명작이다.

※이 글은 DBR(동아비즈니스리뷰) 307호(10월 13일자)에 실린 ‘대변혁의 물결, 전조를 포착하라’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박영규 인문학자 chamnet21@hanmail.net
#서리#얼음#지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