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곳은 바담풍 하는데, 낮은 곳은 바람풍 해야하나[광화문에서/김희균]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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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근래 나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나는 노예인가? 나의 인식 수준은 과거 개발시대에 머물러 있는가?

나는 내 집 마련이 삶의 안정성을 높인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의 주택시장을 볼 때 세입자 입장에서 전세가 월세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집은 사는(buy) 것이 아니라 사는(live) 것이어야 한다는 명제에도 동의한다. 이런 판단에 있어 내가 임대인인가 임차인인가는 변수가 아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높으신 분’들의 상식은 다른 모양이다. 저런 생각을 품은 나는 여전히 집의 노예이자, 아직 ‘쌍팔년도’에조차 이르지 못한 못난 자일 뿐이다. 그러나 당정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다주택을 사수하는 모습, 집을 팔라고 했더니 시세보다 몇억씩 높여 내놓는 모습, ‘직’보다는 ‘집’을 택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기 어렵다. 지도자 스스로 노예의 길을 택하는데 나 같은 장삼이사가 선구자의 길을 걷긴 어렵지 않겠는가.

그칠 줄 모르는 장맛비 속에서도 서울시교육청 앞에 서 있는 국제중 학부모들은 어떨까. 그들은 스스로 대학의 노예라 생각할까? 시대가 바뀌었는데 아직도 공부에나 매달리는 개발시대 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할까?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6월 국제중 폐지 취지를 설명하면서 “기본적으로 일류 대학이 서열화한 상황에서 초등학교부터 치열한 선행을 하는 과정”이라고 국제중을 규정했다. 그는 사립초 입학 경쟁이 예전보다 덜하다며 국제중 인기도 “몇 년이 지나면 과거 일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말했다. 진단도 전망도 잘못됐다. 39개 사립초 중 인기 학교의 경쟁률은 여전히 높고, 전체 경쟁률의 소폭 하락 추세는 학령인구 감소 영향이 크다.

조 교육감은 국제중을 비판하며 분리와 차별을 강조했다. “비용이 충분하게 있는 분들은 고품질의 경쟁을 희망할 것이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분들은 차별 의식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틀렸다. 돈이 많건 적건 고품질의 경쟁을 희망하는 마음은 같다. 내가 돈이 없다고 내 자식이 저품질의 환경에 놓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다. 자고 나면 집값이 오르는 현실에서 시간이 흐르면 월세가 시대정신이 될 거라는 이야기, 일류 대학이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시간이 지나면 국제중이 추억이 될 거라는 이야기, 어느 하나 오늘의 우리에게 답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시세차익을 실컷 누리고, 자신의 자녀들은 특수목적고와 일류 대학을 거쳐 로스쿨이나 의학전문대학원에 보낸 이들이 저리 말하는 건 정의가 아니다.

저들이 국민 눈높이에서 집 걱정, 자녀 걱정 없도록 얼마나 고민했는지 묻고 싶다. 학부모들이 ‘차별 의식’을 느끼지 않도록 일반중에서 고품질의 교육을 제공했는가? 집을 투기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 선량한 국민들이 ‘이사 난민’이 되지 않도록 살 곳을 조성했는가? 이 정부 들어서만 부동산 정책이 수십 번 쏟아지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학교가 죽었다 살았다 하는 꼴을 감내하는 건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다. 이런 국민들마저 임대인과 임차인으로, 비용이 있는 분과 어려운 분으로 편 가르기 하는 건 무슨 위정인가.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

#바담풍#노예#개발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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