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밍이 전부다’[Monday DBR]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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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7월 14일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보스턴 레드삭스와 연속경기 중 첫 경기에서 11 대 10, 1점 차로 아깝게 패한다. 패배 자체보다 더 힘이 빠지게 만든 것은 그 내용이었다. 레드삭스의 간판 타자 테드 윌리엄스 한 명에게 5타수 4안타, 8타점을 빼앗긴 것. 홈런을 무려 3개나 헌납했다.

인디언스의 선수 겸 감독인 루 부드로는 바로 이어 벌어진 두 번째 경기에서 ‘모 아니면 도’ 식의 도박을 감행한다. 윌리엄스가 타석에 등장하자 좌익수를 제외한 모든 야수(수비수)를 경기장 오른편에 몰아놓은 것이다. 왼손 타자인 윌리엄스가 배트를 당기듯이 해서 공을 치는 것을 좋아하고, 그러다 보니 타구가 오른쪽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첫 타석에서 4할 타자 윌리엄스가 친 공은 1루와 2루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유격수 정면으로 날아가 잡혔다. 이것이 수비 시프트(defensive shift) 전술의 시초다.

당시 이 경기가 많은 흥미와 관심을 끌었지만 수비 시프트 전술을 배워간 팀은 거의 없었다. 일단 사람들은 이 족보 없는 작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절박한 상황에서 등장한 요행수 정도로 보는 분위기였다. 효과를 증명하기도 어려웠다. 그 경기에서도 수비 시프트 전략은 윌리엄스의 첫 타석에서만 성공했을 뿐이다.

이후 수비 시프트는 잊을 만하면 가끔씩 등장하는 진풍경 정도로 취급을 받았다. 그러다 50∼60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타구 방향에 대한 분석이 쉬워진 2010년 이후 수비 시프트는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혁신이 됐다. 이제는 프로야구 전반에서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다.

세상에 조금 일찍 태어난 아이디어가 홀대 받는 사례는 다른 스포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축구의 경우 지금은 최후방의 골키퍼부터 수비, 미드필더로 차근차근 공을 이어 나가면서 공격을 쌓아 올리는 ‘빌드업(Build-up)’ 축구가 세계적인 대세다. 그러나 과거에는 골키퍼나 수비수들의 드리블 능력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농구에서는 어떨까. 과거에는 농구 경기에서 키가 가장 큰 센터가 외곽에 나와 3점슛을 쏘는 것을 제대로 된 전술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현대 농구에서는 다르다. 키가 2m 이상인 센터들도 3점슛을 자주 쏜다. 이들이 코트를 넓게 사용하면서 경기 템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빨라졌고, 다양한 움직임과 기술이 가능해졌다.

야구의 수비 시프트 전술, 축구의 빌드업 전술, 농구의 3점슛 넣는 센터들이 과거에 인정받지 못했던 이유는 세상에 너무 일찍 나왔기 때문이다. 즉, 시기상조였다. 비즈니스에서도 마찬가지다. 후일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는 발견이나 발명이 처음엔 인정받지 못하고 빛을 볼 때까지 오랫동안 묻혀 있는 일이 적지 않다.

영국의 수학자 찰스 배비지(1791∼1871)는 1837년에 기계식 컴퓨터를 고안해냈지만 그 진가를 알아보는 투자자를 찾지 못해 개발을 끝마칠 수 없었다고 한다. 또 전기자동차는 가솔린, 디젤 엔진을 사용하는 차보다 앞선 1830년대에 이미 고안됐었지만 이제야 빛을 보고 있다. 요즘 스마트폰에 쓰이는 터치 컴퓨팅 기술도 1980년대 초반에 이미 시제품이 나와 있었다. 30년 가까이 그게 쓸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 뿐이다.

어느 분야든 새로운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무엇이든 적시적소에 활용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타이밍이 전부다(Timing is everything)’라는 말이 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이자 작가였던 올리버 색스(1933∼2015)는 사람들 마음에 새로운 개념이 들어갈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간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불쾌해하고 위협을 느낀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은 이런 불쾌감을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이거나, 이런 심리적 저항이 작은 개념이나 제품을 찾아 나서야 한다. 적극적으로 주변의 의견을 구하며, 새로운 것을 계속 시도하되 실패를 분석할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

※이 글은 DBR(동아비즈니스리뷰) 6월 15일자(299호)에 실린 ‘스포츠도 경영도, 기술의 생명은 타이밍’을 요약한 것입니다.

김유겸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 ykim22@snu.ac.kr
#타이밍#적시적소#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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