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변호사 도진기 작가가 추리소설을 쓰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22일 16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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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기자의 젊은 글쟁이를 만나다]

추리소설 작가 겸 변호사 도진기 씨. 탄탄한 독자층을 확보한 그는 “읽는 분들이 제 개인적 취향에 호응해준 것”이라고 겸손해 하면서도 “독자들이 있기 때문에 쓴다”고 말했다. 동아일보DB
추리소설 작가 겸 변호사 도진기 씨. 탄탄한 독자층을 확보한 그는 “읽는 분들이 제 개인적 취향에 호응해준 것”이라고 겸손해 하면서도 “독자들이 있기 때문에 쓴다”고 말했다. 동아일보DB
소설 ‘세 개의 잔’은 진구와 해미가 결별하면서 시작된다. 백수탐정 진구와 환상의 여친 해미가! ‘진구 시리즈’의 팬이라면 당혹스러울 법하다. 2012년 소설집 ‘순서의 문제’에서 만난 이 연인은 ‘진구 시리즈’ 다섯 번째 책인 ‘세 개의 잔’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사건 사고 현장을 누벼왔다. 해미와 헤어진 뒤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혼자 술을 마시던 진구에게 다가온 한 남성은 두툼한 돈다발을 건네면서 기이한 제안을 한다. 이전에도 이런 제안을 이용해 아파트 한 채값 돈을 손에 넣은 그이니 솔깃하지 않을 리 없다.

대학을 중퇴하고 특별한 직업 없이 빈둥대며 살면서도 법 지식과 추리 능력으로 어렵지 않게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온 진구. 정의감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추리 과정에만 순수한 희열을 느끼는 이 청년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진구를 만든 사람은 변호사 도진기 씨(53)다. 그는 43세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해 10년 여 추리소설을 써왔다. 이제 50대가 됐지만 추리소설가로서의 활동은 어느 때보다 왕성하다. ‘젊은 작가’로 불릴 만하다.

최근 서울 서초구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난 도진기 씨는 진구에 대해 “절반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고, 절반은 내가 되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법대에 입학한 뒤 공부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지독하게 방황했던 그이다. 진구는 젊은 날의 자신의 모습과 멀지 않다고 했다. “정의로운 변호사, 몸을 던지는 의사….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대개 이런 사람들이 주인공이어야 하겠지만 제게는 이들이 판타지였습니다. ‘진구’가 좀더 현실적인 인물이 아닐까요.”

‘진구 시리즈’를 비롯해 도진기 씨가 지금까지 출간한 추리소설은 10권이 넘는다. 2010년 한국추리작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데뷔한 이래 해마다 한 권씩 낸 셈이다. 20년 간 판사 생활을 했고 개업 4년차인 변호사라는 그의 직업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생산력이다. 작가는 그러나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평일엔 새벽에 일어나 부엌에 앉아 글을 썼고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면 집필에 몰두했다. 골프를 치지도 않고 술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어서 소설에 시간을 들이는 게 자연스러웠다. “내가 좀 빨리 쓰는 스타일이다. 머릿속에서 이야기는 이미 훌쩍 전개가 됐는데 타이핑이 못 따라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웃었다. 다작(多作)이 이해되는 대목이었다.

도진기 씨는 “뻔하지 않은 서사를 만들기 위해 구상을 거듭한다”면서 “중요한 건 이야기다. 나는 독자 편이니까”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DB
도진기 씨는 “뻔하지 않은 서사를 만들기 위해 구상을 거듭한다”면서 “중요한 건 이야기다. 나는 독자 편이니까”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DB
도진기 작가가 추리소설 집필에 나선 것은 판사로 일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을 때였다. 품이 덜 들어가는 에세이나 법률 지식을 소개하는 서적이 아니라 ‘노동’이라고 할 만한 추리소설에 도전한 계기가 궁금했다. 그는 다시 ‘절반’을 언급했다. “제 안에 절반의 판사가 있었고 절반의 작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판사란 관습에 따라야 하는 사람이지만 작가는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원만하게 판사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상상력에 대한 열망은 늘 꿈틀댔다. 마침 일본 추리소설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그 역시 애독자가 됐다. 뛰어난 일본 소설을 보고 동기부여가 된 거냐고 묻자 그는 “실은 졸작들을 보고 이런 것도 출판이 되나 싶어 용기를 갖게 된 것”이라면서 껄껄 웃었다. “그런 소설들도 서평을 보니 칭찬 일색이더라. 독자들이 ‘우리나라에도 도진기 소설 있는데’라고 언급해 주면 좋겠다는 게 바람이었다.”

물론 유년기의 그 세대를 키운 것 중 하나는 추리소설이다. 도진기 씨 역시 코난 도일과 아가사 크리스티, S.S.반 다인, 존 딕슨 카 같은 추리 작가들의 작품에 푹 빠졌었다. 그렇다 해도 창작은 독서와는 다른 영역이다. 법률가의 경험과 지식이 추리소설의 길로 이끈 것일까. 그는 “판사라는 직업은 내가 쓰는 추리소설과는 연결 고리가 거의 없었다”고 했다. 그의 추리소설은 트릭을 이용하는 본격 미스터리물이다. “트릭을 써서 살인하는 일은 드뭅니다. 실제로 벌어지는 살인사건들은 대개 욱해서 사람을 죽이는 경우에요. 그런 면에서 제 소설은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것이겠죠(웃음). 그렇지만 호기심 많고 재미를 추구하는 독자들이 좋아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제가 묵직한 사회파 미스터리가 아닌 본격 미스터리를 택한 것도 작가 자신이 재미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콘텐츠의 충실함으로 따지면 대학교재가 최고일 텐데, 일반 독자들은 안 읽잖아요. 책을 읽을 때 뭣보다 중요한 건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도진기 씨의 새 소설 ‘세 개의 잔’.
도진기 씨의 새 소설 ‘세 개의 잔’.
‘세 개의 잔’을 비롯한 다양한 트릭들은 정교한 논리를 필요로 한다. 중고교 시절 수학을 좋아했다는 도 씨의 회고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추리소설은 어디까지 숨기고 어디까지 드러내야 할지를 빈틈없이 계산해서 써야 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구상에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가령 장편 ‘나를 아는 남자’에서 진구는 직장상사 부인의 부탁으로 상사의 불륜 여부를 확인하고자 집에 잠입했다가 상사의 시체를 발견한다.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면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상사의 뒷조사를 하던 진구는 상사가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깔끔한 매너를 갖춘 것으로 알려진 상사와는 거리가 먼 듯한 정신과 진료 이력이 어떻게 들어맞게 엮이는가를 추리소설 작가는 증명해내야 한다. 독자가 납득할 만한 논리를 만들기 위해 작가는 철저한 서사 전략을 짜야 한다.

도 씨는 “작가는 두 가지 재능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는 글을 잘 쓰는 재능, 다른 하나는 이야기를 만드는 재능이다. 이 두 재능은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상반된 것이다. “그동안 국내에선 순수문학을 우대하는 분위기가 강해 작가들이 문장에 많은 신경을 기울였는데, 장르문학 작가들은 이야기를 구상하는 데 상당한 비중을 두어야 한다”면서 “과격하게 말하면 맞춤법이 틀려도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독자들은 좋아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의 소설은 중국과 프랑스에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해외의 독자들에게 한국 추리소설의 감성을 전하고 싶다는 게 작가의 바람이다. “일본 만화 ‘슬램덩크’와 ‘북두신권’이 커다란 인기를 모았던 1980, 90년대에 제가 무척 좋아했던 만화는 고행석의 ‘불청객’이었습니다. 일본 만화도 재미나게 보긴 했지만 우리 만화에 제 마음을 울리는 한국 만화작가만의 무언가가 있었어요. 우리 추리소설의 그 ‘무엇’이 해외 독자들에게 전달되길 기대합니다.”

유튜브의 시대에 글의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작가에게 물었다. 그는 “상상력”이라고 답했다. “영상을 통해서 전달되는 이야기는 그 영상 이상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글을 통해 전달되는 서사는 독자마다 다르게 상상할 수 있어요. 특히 사람의 마음을 묘사하는 것은 어떤 매체도 글을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도진기 작가의 글쓰기 노하우

① 서사에 공을 들인다=“장르문학 작가들은 이야기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독자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목표이지 노벨문학상이 목표가 아니니까요. 저는 구상에는 몇 달씩, 심지어 1, 2년씩도 걸립니다. 그렇지만 이야기가 만들어지면 쓰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②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구상을 밀고 나가라=“‘세 개의 잔’을 처음 구상했을 때는 현재 소설의 중반 정도 이야기까지만 떠오른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중반까지만 쓰고 마칠까 했는데 스스로 충분히 해결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뻔한 얘기가 아니라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개연성을 갖추도록 숙고해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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