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네이버가 증식시킨 익명의 ‘찌질이’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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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논설위원
이기홍 논설위원
‘9억ㅋㅋ 나이 똥구멍으로 처먹었네ㅋㅋ 노인들이 인생의 지혜가 있어? ㅋㅋ 당해도싸다~!’

‘바~보’

‘박근혜 추종하는 노인들 수준보소 ㄷㄷㄷㄷ 그노인 자식도 참 서글프겠네…저런 노인 수발할려면,’

‘늙으면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는데 투표권 회수해야지 이런 틀딱들 때문에 태극기 부대가 나라 말아먹는다’

‘누굴 욕하냐ㅋ 그냥 죽어야지’

지난달 18일 낮 네이버의 한 기사를 우연히 읽었다. 연합뉴스가 송고한 ‘보이스피싱 한통에…70대 노인, 예금 깬 돈 9억원 날려’라는 기사였다. 한 노인이 보이스피싱범에 속아 9억 원을 사취당했다는 안타까운 내용이었다.

이어 무심코 댓글을 보다가 눈을 의심했다. 피해자인 노인을 향해 조롱을 퍼붓는 댓글들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필자가 기사를 읽은건 게재된지 2시간 정도 지난뒤였다. 이미 38건의 댓글이 있었는데 그중 16건이 조롱과 비아냥이었다.

그후 38일이 지난 25일 현재 이 기사에는 총 81건의 댓글이 달려있다. 그중 19건은 삭제됐 고, 62건이 남아있는데 그중 27건이 비아냥과 놀림, 인신공격성 내용이다. 보이스피싱 범죄의 심각성과 엄벌을 촉구하는 내용이 32건, 피해자를 위로하는 댓글은 3건이다.

‘드루킹’ 사건은 네이버 등 포털이 십 수년간 장려해온 댓글 공간에서 독버섯처럼 자라온 댓글 조작의 실태와 폐해를 빙산의 일각처럼 드러내주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익명 댓글은 이미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치명적 병폐 중 하나였다. 악성 댓글이 흉기가 되어 숱한 연예인, 청소년들이 고통을 겪고 심지어 자살했다.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조사에선 항상 댓글 실명화 찬성여론이 반대 보다 두세 배 가량 높게 나온다. 하지만 학자들 중엔 표현의 자유를 들며 펄쩍 뛰는 이들이 많다. 특히 인터넷 실명제는 이미 위헌판결을 받았으니 댓글 실명화는 검토할 필요조차 없다는 논리를 많이 편다.

과연 그럴까. 2012년 헌재가 위헌판결을 내린 것은 2006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정보통신망법 제 44조 5항, 즉 하루 이용자 10만 명 이상의 사이트 운영자는 게시판 이용자의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치도록 한 조항이었다. 당시 헌재가 위헌판결의 근거로 든 것은 표현의 자유 위축과 더불어, 인터넷 사업자가 이용자의 주민번호 등을 수집해 장기간 보관함으로써 개인정보 유출 위험이 커지며, 법 시행 이후에도 악성 게시물이 그다지 줄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그 법은 사실 문제가 있었다. 적용 대상이 명확치 않아 뉴스댓글과 무관한 대다수의 인터넷 사이트들에도 제약을 가했다. 또 게시판 이용 전에만 본인 확인을 할 뿐 실제 댓글 활동은 아이디나 가명을 쓰니 악성 댓글을 줄이는 효과도 미비한 과잉 규제였다. ‘댓글 실명제’라기 보다 ‘게시판 이용 전 본인 확인제’였던 것이다. 헌재 판결 당시는 네이트와 싸이월드 회원 3500만 명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 여파로 사이트 가입시 개인정보를 기입하는데 대한 반발과 우려가 높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온라인 이용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즉 6년 전 헌재판결이 댓글 문화 개선을 위한 실명화 논의의 길을 막아버린건 아니다.

이제 인터넷 활동 전체에 실명을 요구하는 획일적 실명제와 구분해 뉴스 댓글에 한해 실명화 원칙을 확산시킬 때가 됐다. 법으로 강제하기 보다는 댓글 여론조작의 난장(亂場)이 된 네이버 등 포털은 댓글을 폐지하고, 각 언론사들은 자사 사이트의 뉴스댓글을 실명으로 운용하는 방향으로 뜻을 모아야 한다. 물론 익명의 표현공간은 반드시 필요하며 보장되어야 한다. 익명이 아니면 하기힘든 고발, 폭로 등을 위해서다. 사이트내에 그런 익명의 발언대 공간을 별도로 만들면 된다.

댓글 실명화에 반대하는 이들은 폭언이나 명예훼손성 댓글은 지금도 처벌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무거운 처벌이 내려질 가능성도 별로 없는 짧은 인신공격성 댓글들을 모아 경찰에 들고 가기까지 피해자가 받을 정신적 고통과 절차의 부담감은 외면한 피상적 주장이다. 거림낌없이 타인에게 인신공격을 해댈 수 있도록 조장하는 환경을 바꾸지 않은 채, 나중에 찾아내서 처벌할 길이 있으니 괜찮다고 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댓글을 실명으로 달도록 하면 사이버 공론장이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론의 광장에 복면을 한 무리들이 들어와 발언대 주변을 점령한 채 욕설과 삿대질을 해대면, 오히려 일반인들의 발언 의지가 오그라들 것이다.

열린 공론의 광장을 위축시키는 것은 참여자들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책임감과 예의가 아니라, ‘찌질이’들이 광장 아무 데나 멋대로 배설을 해댈 수 있도록 조장하는 익명이라는 복면이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네이버#악플#댓글 실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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