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면 큰 성과” 김정은 말 전하자… 트럼프 “좋다” 즉석 수락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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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김정은 5월 회담]특사단, 숨가빴던 백악관 5시간


8일(현지 시간) 오전 9시 50분,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미국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 덜레스공항에 도착했다. 검색대를 신속하게 빠져나온 뒤 주미 대사관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차량에 올라타고 곧장 워싱턴으로 향했다. 정 실장은 다시 한번 메모를 점검했다. 대북특사로 방북한 뒤 카운터파트인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전화로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지만 정작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이번에도 도착해서 확정된 트럼프 면담

앞서 5일 평양을 방문했던 정 실장은 김정은과의 정확한 회동 시간을 알지 못한 채 비행기에 올랐다. 워싱턴도 사정은 비슷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과 정 실장, 서 원장이 현지 시간으로 9일(금요일)에 만나는 쪽으로 일정을 조정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정 실장과 서 원장은 주미 대사관에서 점심식사를 마치자마자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백악관 웨스트윙에 들어섰다. 오후 2시 30분부터 3시까지 정 실장은 평소 친구로 부르는 맥매스터와, 서 원장은 지나 해스펠 미 중앙정보국(CIA) 부국장과 각각 만났다. ‘정의용-맥마스터’ 라인과 ‘국정원-CIA’ 라인은 지난달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 간 회동 주선의 핵심 축이기도 했다.

백악관 인사들과의 미팅은 계속 이어졌다. 3시부터는 정 실장, 서 원장과 맥매스터 보좌관과 해스펠 부국장이 모두 참여하는 ‘2+2’ 미팅을 가졌다. 끝나자마자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존 설리번 국무부 부장관, 데이비드 멀패스 재무부 차관, 댄 코츠 국가정보국장 등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안보 관련 참모 20명이 한꺼번에 들어와 정 실장과 서 원장의 설명을 들었다. 우리 측에서는 조윤재 주미 대사가 합류했다. 이례적으로 한국과 미국의 ‘3+20’ 미팅이었다.

○ 트럼프 “당장 집무실로 들어오라”

원래 이 브리핑은 오후 3시 30분부터 1시간가량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한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끝났다. 한창 브리핑이 진행되던 중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당장 집무실로 들어오라. 빨리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 이에 정 실장과 서 원장은 4시 15분경 급하게 백악관 오벌오피스(대통령 집무실)로 향했다. 오벌오피스에서 정 실장은 트럼프 대통령 바로 옆에 앉아 김정은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다. “여기까지 온 것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큰 힘이 됐다”고 운을 뗀 뒤 방미 전까지 사흘 동안 여러 차례 되뇌고 연습했던 김정은의 메시지를 전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을 가급적 조기에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달했다.”

이어 정 실장은 “평양에서 김정은을 만나 보니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진정성이 느껴졌다. 물론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지만 김정은에 대한 우리 판단을 미국이 받아주고,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순간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이고 마이크 펜스 부통령, 존 켈리 비서실장, 조지프 던퍼드 합참의장 등은 일제히 정 실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악관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 트럼프 “한국 대표 이름으로 직접 해 달라”

정 실장의 설명을 들은 트럼프 대통령은 곧바로 “좋다. 만나겠다”고 수락했다. 북-미 중매 외교를 위해 줄타기를 해 온 청와대가 애타게 기다린 순간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주변 참모들을 보며 “거 봐라. (북한과) 대화하는 게 잘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김 대변인은 밝혔다.

당초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을 “4월에 만나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 실장이 “4월 말에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만큼 우선 남북이 만난 뒤에 북-미가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수용해 5월로 조정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정 실장에게 “한국의 대표들이 백악관에서 직접 발표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 실장은 물론이고 청와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이에 정 실장은 오후 5시부터 맥매스터 보좌관 방에서 발표 문구를 미국 측과 조율하는 한편 급하게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관련 상황과 합의 문안을 보고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기자실을 갑자기 찾아 “한국이 북한과 관련해 오후 7시에 중대 발표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실을 찾은 건 취임 이후 처음이다. 백악관에 어둠이 깔린 오후 7시 5분, 정 실장은 백악관 웨스트윙 앞에서 북-미 정상이 만나기로 했다는 발표문을 읽었다. 정 실장이 워싱턴에 도착한 지 9시간여 만, 그리고 백악관에 발을 디딘 지 5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트럼프#김정은#북미대화#대북특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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