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판결로 죽는구나 부담감… 사형은 보복감정 충족시킬 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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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강호순에게 사형선고 내린 이성호 국가인권위원장 인터뷰

이성호 국가인권위원장은 26일 오전 서울 중구 저동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사형제 폐지의 전 단계로 ‘사형 공식 모라토리엄(집행 중단)’을 선언하자”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이성호 국가인권위원장은 26일 오전 서울 중구 저동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사형제 폐지의 전 단계로 ‘사형 공식 모라토리엄(집행 중단)’을 선언하자”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2009년 7월 23일 서울고법 형사3부는 부녀자 8명을 납치해 성폭행하고 살해하는 등 연쇄살인을 저지른 강호순(48)의 항소심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을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극형 선고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사형 선고 이유를 밝혔다. 강호순은 상고를 포기했고 사형은 확정됐다.

당시 사형을 선고한 재판장은 이성호 국가인권위원장(60)이다. 그는 7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사형제도 폐지를 검토해 달라’는 특별보고를 했다. 흉악범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판사가 이제는 사형제 반대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8년 사이 그의 생각이 왜 바뀌었는지 26일 서울 중구 저동 인권위 사무실에서 만나 들어보았다.


―인권위가 2012년 3월 이후 5년 9개월 만에 대통령에게 특별보고를 했다. 무슨 이유였나.

“한국은 현재 20년째 사형이 중단돼 실질적으로 사형이 폐지된 국가다. 그런데 ‘조두순 석방 반대’ 청와대 국민청원 등을 거치며 사형 집행 재개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대통령 생각이 바뀌어 사형을 집행하라고 하면 사형이 집행될 상황이다. 사형 집행을 막기 위해 사형에 대해 공식 모라토리엄(집행 중단)을 선언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특별보고를 했다.”

―문 대통령의 반응은 어땠나.

“문 대통령은 인권 변호사 출신이어서 인권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인권위 특별보고에 공감을 표시했다. (사형제 폐지는) 국민을 설득해야 하는 일이라며 인권위의 역할을 강조했다.”

―법관 시절인 2009년 강호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에는 무슨 생각이었나.

“법관도 사형 선고는 피하고 싶어 한다. 아내도 평소에 ‘사형 선고는 하지 말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국민에게 불안감을 준 사이코패스 사건이었다. 강호순은 반성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사형제가 존재하는 한 사형을 선고해야 했다. 술을 마시진 않았지만 선고가 끝나고 배석 판사들을 다독였다.”

―사형 선고를 한 데 대해 후회는 없었나.

“강호순이 상고를 안 했다. 내가 최종 사형선고를 한 재판장이 됐다. ‘사형이 집행되면 내 판결로 죽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형 선고 다음 날 바로 집행을 하기도 했던 군사정부 시절이라면 더 부담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강호순에게 사형을 선고할 당시는 이미 사형 집행이 중단된 지 10년이 넘은 때였다. 사형이 실제 집행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형 선고는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한다는 의미였다.”

―사형을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1980년대 초 검찰 시보를 하면서 중학생 제자 이윤상 군을 유괴해 살해한 체육교사 주영형(1985년 사형 집행)을 다룬 신문 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다. 보통 살인자는 악마가 아닐까 생각하지 않나. 그런데 주영형은 악마적 행위를 저질렀지만 평소에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사형 집행을 앞두고 두 눈과 콩팥을 기증하기도 했다. 악한 행동을 해도 모두 인간이다. 사형은 옳은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형제 폐지에 대해서는 반대 여론이 높다.

“범죄 피해자 인권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형은 단지 보복 감정을 충족시킬 뿐이다. 조봉암 사건이나 인민혁명당 사건, 김대중 전 대통령 사형 판결처럼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도 있다.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최고형도 사형이 아닌 종신형이다. 결국 국민을 설득해야 할 문제다. 정치 지도자의 결단이 중요하다.”

―2010년 사형제 합헌 결정을 내렸던 헌법재판소도 이제는 상당수 재판관이 사형제에 부정적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

“법원을 벗어나 인권위에 와 보니 그동안 시야가 좁았다는 생각이 든다. 헌재와 대법원의 역할은 소수자 보호다. 대통령이나 국회가 못하는 일을 사법부가 해줘야 할 때가 있다. 사법부 지도자도 넓은 의미에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다. 유권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분들이 용단을 내려줬으면 한다.”

―문재인 정부 임기 중에 사형제가 폐지될 수 있다고 보나.

“현실적으로 국민 대다수가 사형제 폐지를 반대한다는 점을 잘 안다. 지금은 국민을 설득하는 과정이다.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공식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단계적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생명을 빼앗는 사형이 옳은가, 그른가는 국민들도 생각해 봐야 한다.”
 

:: 이성호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

△ 서울대 법대 졸업 △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로스쿨 졸업
△ 제22회 사법시험 합격 △ 대법원 재판연구관, 특허법원 수석부장판사, 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
△ 서울남부지법원장, 서울중앙지법원장 △ 2015년 8월∼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장관급)
 
이호재 hoho@donga.com·김윤수 기자
#이성호#국가인권위원장#사형제#강호순#사형#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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