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가 이제 또렷이 보여요”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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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피아니스트 ‘VR’로 빛 찾다… 희귀병 딛고 獨공연 마친 노영서 씨

기어VR 머리에 쓴 피아니스트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노영서 씨가 시각 보조 애플리케이션 ‘릴루미노’가 
깔린 기어VR를 쓰고 연주회 리허설을 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노 씨가 평소 악보를 읽어 온 방법이다. 노 씨는 “A3용지 크기로
 확대 출력한 악보를 눈 바로 앞에 둬도 잘 안 보여 괴로웠다”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삼성전자 제공
기어VR 머리에 쓴 피아니스트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노영서 씨가 시각 보조 애플리케이션 ‘릴루미노’가 깔린 기어VR를 쓰고 연주회 리허설을 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노 씨가 평소 악보를 읽어 온 방법이다. 노 씨는 “A3용지 크기로 확대 출력한 악보를 눈 바로 앞에 둬도 잘 안 보여 괴로웠다”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삼성전자 제공
두 달여 전인 10월 19일 독일 할레비텐베르크 마르틴루터대 연주홀. 23세의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올랐다. 머리에 삼성전자가 만든 가상현실(VR) 헤드셋인 ‘기어VR’를 착용한 채였다. 그의 손끝에서 독일에서 활동 중인 러시아인 작곡가 마리야 레온티예바가 작곡한 ‘사계’가 매끄럽게 흘러나오자 관객은 숨을 죽인 채 마른 침을 삼켰다. 69분간의 연주가 무사히 끝난 뒤 이날 자리를 채운 관객 300명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연주는 20일까지 모두 네 차례 펼쳐졌다.

주인공은 한국예술종합학교 피아노 전공 전문사 과정을 밟고 있는 노영서 씨. 6세 때 피아노를 시작한 노 씨는 ‘스타가르트’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 1만 명 중 2명꼴로 발병한다는 이 병은 특별한 치료약이 없어 대부분 40∼60세에 실명한다. 12세 때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은 노 씨는 이제 글씨 등 선명한 것을 읽어내는 중심부 시력이 아예 없다. 주변부 시력만 20% 정도 남아 형체만 뿌옇게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다.

노 씨에게 유독 잔인한 병이었다. 악보가 보이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피아노는 다른 악기보다 악보가 복잡하고 읽어야 할 음표가 많다. 노 씨는 악보를 남들의 몇 배 크기인 A3 용지 사이즈로 확대 출력해서 쓴다. 이마저도 악보를 눈동자 바로 앞에 대고 음표를 하나하나씩 읽는다. 한 페이지를 읽는 데 하루 종일 걸린다. 이 때문에 경쟁자들은 수없이 도전하는 콩쿠르도 노 씨에겐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두 시간짜리 연주 프로그램을 준비하려면 악보를 읽는 데만 1년 이상 걸리기 때문이다. 악조건 속에서 노 씨는 2015년 동아음악콩쿠르 클래식소나타상을 받았다.

노 씨는 7월 모험을 강행했다. 노 씨의 연주 영상을 우연히 온라인에서 보고 곡을 헌정하고 싶다는 레온티예바 씨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19일 삼성전자 서울 R&D센터에서 만난 노 씨는 “작곡가가 내가 시각장애인인 줄 모르고 곡을 줬다”고 했다. 이어 “곡 헌정이 요즘 드문 데다 내가 가장 먼저 연주해볼 수 있다는 욕심에 일단 곡을 받았는데 69분짜리 곡이라 막상 10월로 잡혀 있는 독일 연주회까지 악보를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걱정이 점점 커졌다”고 했다.

두껍게 묶은 악보와 매일 씨름하는 아들을 보며 안타까워하던 어머니 차영은 씨는 우연히 삼성전자가 시각보조 애플리케이션(앱·응용프로그램)인 ‘릴루미노’를 개발해 무료로 배포한다는 기사를 접했다. 릴루미노는 ‘빛을 돌려준다’는 뜻의 라틴어다.

차 씨는 “8월 22일, 아직 날짜조차 잊히지 않는다”며 “그날 바로 릴루미노 개발팀에 e메일을 보내 앱을 내려받는 방법을 물어봤다”고 했다. 릴루미노는 삼성전자가 창의적인 조직문화 확산을 위해 만든 ‘C랩(Creative Lab)’ 프로그램에 참여한 임직원 3명이 개발했다. 스마트폰에 앱을 내려받은 뒤 기어VR에서 실행하면 최대 10배까지 확대해 볼 수 있다.

릴루미노팀의 조정훈 리더는 “스마트폰 후면카메라가 시각장애인이 인식하기 쉬운 형태로 영상을 바꿔줘 기존에 왜곡되고 뿌옇게 보이던 사물을 보다 뚜렷하게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개발팀의 e메일 답장을 받자마자 모자는 그날 저녁 바로 기어VR와 스마트폰을 샀다. 노 씨는 처음 릴루미노 앱으로 세상을 보던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저 멀리 있는 광고판 글씨가 보이더라고요. 이 정도면 음표도 읽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정말 죽으란 법은 없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차 씨는 “시중의 시각보조기는 가격도 1000만 원이 넘는 데다 휴대성이 떨어져 피아노를 치면서 쓰는 게 불가능했다”며 “다행히 아들에게 릴루미노가 어지럼증 등 부작용 없이 잘 맞아 두 달간 맹연습했고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했다. 노 씨가 VR 기기를 머리에 쓰고 연주했다는 소식이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면서 현재 세계 곳곳에서 시각장애인들의 문의가 삼성전자로 이어지고 있다.

조 리더는 “출시 4개월 만에 릴루미노 홈페이지(www.samsungrelumino.com)에서 1000명 정도가 내려받았다”고 했다. 이 중에는 다섯 살 아들을 위해 전자 전시장까지 직접 찾아온 스페인의 한 아버지도 있었고, 국내 시각장애 환아 부모들의 모임도 있었다. 조 리더는 “아기 머리가 작다보니 VR 기기가 딱 맞지 않고 아이들이 겁을 내 적응에 실패한 게 가장 마음이 아팠다”며 “이 아이들도 커서 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앱을 업데이트하기로 부모님들과 약속했다”고 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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