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부형권]더도 말고 반도체만 같아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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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형권 경제부 차장
부형권 경제부 차장
잘되는 집안엔 잘나가는 인물이 있다. 집안의 든든한 기둥 같은, 추석 명절에 가족 친지가 모이면 그 중심이 되는 인물. 그가 우리 집안의 구성원인 덕분에 부족한 나도 묻어갈 수 있다. ‘나에게도 저렇게 성공할 잠재력이 있을 거야. 그 피가 어디 가겠어.’ 크고 튼튼한 기둥이 있는 집은 강한 비바람을 맞아도 쉽게 내려앉지 않는다.

한국 경제라는 집안엔 반도체란 기둥이 있다.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에 북한의 핵 위협까지 겹치면서 소비 투자 생산 건설 관광 등 주요 경제지표가 다 안 좋다. 수출 하나만 좋은데 그 수출을 반도체가 이끈다. 한국 수출의 약 16%(이하 올해 7월 말까지 누적 기준)를 점유하는 1위다. 3위 자동차(7.7%)의 2배가 넘는다. 2위 선박해양은 9.1%. 반도체는 1992년 수출 1위 품목으로 등극한 이래 올해까지 26년 동안 21회나 수출 금메달(1위)을 목에 걸었다.

한국무역협회는 최근 보고서에서 이렇게 극찬했다. “반도체 수출은 지난 40년간 매년 15%씩 증가했다. 올해도 전체 무역 흑자액의 절반 정도를 담당하며 사상 첫 900억 달러(약 103조5000억 원) 돌파가 무난하다. 반도체는 안정적인 국제수지 유지뿐만 아니라,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국가 이미지 제고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국 반도체엔 중국의 사드 보복도 먹히지 않는다. 수출되는 한국 반도체의 38.4%가 중국 땅으로 들어간다. 최대 수입국 중국의 정보기술(IT) 업체들이 스마트폰을 생산하면 할수록 핵심 부품 한국 메모리반도체 수입도 증가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반도체에 사드 보복을 하면 중국 경제가 제 발등을 찍게 된다. 미국 대표 기업 애플이 일본 반도체 도시바 인수전에 뛰어든 이유도 한국 반도체에 대한 지나친 의존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다. 든든한 기둥(반도체) 덕분에 집안(한국 경제) 체면이 그나마 선다.

반도체가 저절로 큰 기둥이 된 건 아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듯,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1위 제품을 키우는 덴 나라 전체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 본격적 시작은 삼성전자가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1974년으로 잡는다(무역협회 보고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반도체야말로 한민족의 재주와 특성에 딱 맞는 업종이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젓가락 문화권이어서 손재주가 좋고, 집에서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등 청결을 중시한다. 밥상 한가운데 찌개나 탕을 놓고 공동으로 식사할 만큼 팀워크도 좋다. 이런 문화는 고도의 반도체 생산에 아주 적합하다.”(이건희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정부는 1981년 ‘반도체 공업육성계획’을 세워 본격적인 지원에 나섰다. 그 후로도 정부의 반도체 육성방안 틀은 ‘각종 규제는 완화하고 금융 및 세제 지원은 강화하자’였다. 바람직한 ‘정경 유착’인 셈이다.

반도체맨들의 피와 땀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영하 15도의 맹추위에서도 공장을 짓고, 일본이 6년 걸린 제품 개발 주기를 6개월로 단축하기도 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세로로 가늠한 적이 없어요. 늘 밤늦게 퇴근해서 잠자는 아이의 키를 두 팔 벌려 가로로 측정하곤 했지요.” 몇 년 전 삼성전자 기흥공장을 방문했을 때 만난 고참 반도체맨의 회고. 깨어 있는 아이를 보지 못했던 그의 노력과 희생이 모여 한국 반도체를 만든 것이다.

혼란스러운 한국 경제에서 반도체 뒤를 이을 큰 기둥이 누가 될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꼭 나타나리라 믿고 한가위 둥근 달을 향해 미리 기도하련다. ‘더도 덜도 말고 반도체만 같아라.’
 
부형권 경제부 차장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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