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성호]‘240번 버스’의 눈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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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사회부 차장
이성호 사회부 차장
타고 내리려면 승객 사이를 비집고 지나야 한다. 시끄러운 엔진 소리 탓에 2, 3m 옆 상대방 말도 알아들을 수 없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니 자리 옮기는 게 곡예나 다름없다. 매일 아침저녁 버스에서 겪는 일이다. 처음 ‘240번 버스’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고개를 갸우뚱했다. 출퇴근길 버스에서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13일 오전 버스에 올랐다. 문제가 된 ‘목격담’을 떠올렸다. 목격담에서처럼 네 살(실제로는 일곱 살이었다) 아이라면 흔들림 탓에 제 몸 가누기도 어려워 보였다. 다른 승객에 떠밀렸다면 내리기 전에 넘어졌을 것이다. 엄마가 못 봤을 리 없다. 또 퇴근길 버스에 가득 찬 승객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면 운전사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버스가 내달렸다면, 정말 간 큰 운전사일 것이다.

목격담을 찬찬히 보면 누구나 이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많은 누리꾼은 포털 게시판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퍼날랐다. 궁금증이나 의심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버스 운전사를 향한 날 선 비난만 더해졌다. 포털과 SNS를 기반으로 한 일부 매체는 목격담과 누리꾼 반응을 복사하듯 그대로 옮기기 바빴다. 언론으로서 검증 절차는 없었다. 어린아이를 내팽개친 운전사, 막장 운전 같은 표현이 기사를 장식했다. 240번 버스 운전사는 온라인 세상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인(惡人)이 됐다.

괴담의 폭주는 오래가지 못했다. 진실의 실체가 드러나기까지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아이가 내린 폐쇄회로(CC)TV 장면, 차단봉에 막혀 차로 변경이 어려운 도로 여건 등이 언론의 검증을 통해 속속 확인됐다. 목격담이나 온라인 뉴스에서 찾아볼 수 없던 내용이다. 기존 언론의 훈련된 기자들이 꼼꼼한 검증에 나서면서 진실과 거짓이 가려진 것이다. 그리고 상황은 반전됐다.

어쩌면 목격담의 주인도 뒤늦게 아이 엄마를 보고 착각했을 수 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린 건 진짜 순수한 선의(善意)일 수 있다. 240번 버스 논란은 부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과장된 선의’가 어떻게 가짜뉴스를 대량생산하는지 생생히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웃고 넘어가기에는 상처가 깊다. 240번 버스 운전사 김모 씨(60)는 이틀간 지옥을 봤다. 그는 14일 만난 동아일보 기자에게 ‘극단적 선택’을 언급했다. 김 씨가 다시 희망의 끈을 잡은 건 역설적으로 언론 보도였다. 검증 없는 뉴스와 SNS라는 흉기에 마주 섰던 김 씨는 사실 확인을 거친 기존 언론의 보도를 본 뒤에야 지옥에서 벗어났다. 그는 여전히 유령처럼 떠도는 가짜뉴스와 악플을 걱정하면서도 “다시 운전대를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합리적 의심이 배제된 정보, 검증 없는 진실은 갈등을 부채질한다. 최근 불거진 서울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 갈등이 대표적이다. 2년 넘게 이어진 갈등은 최근까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반대 주민 앞에 무릎 꿇은 장애학생 부모의 영상을 계기로 언론의 분석과 대안 제시가 이뤄지며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남았지만 적어도 ‘나는 되고 너는 안 된다’는 식의 진흙탕은 벗어났다.

감당키 힘들 정도로 많은 뉴스가 쏟아지는 사회다. 똑같이 뉴스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사실과 거리가 먼 가짜가 판친다. 그런 뉴스 때문에 수많은 240번 버스 운전사가 눈물을 흘렸다. 사실 확인, 그 원칙에 충실한 언론이 꼭 필요한 이유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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