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김해공립보통학교의 5학년 담임인 일본인 교원 마쓰시타 고로(松島五郞)는 점심시간에 지각을 했다는 이유로 학생의 손가락 사이에 만년필을 넣어서는 혹독한 형벌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 평소에 조선인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자주 했으며 자그마한 과실이라도 있으면 학생을 유도로 제재를 하는 일이 종종 있어 이에 항의하기 위해 학생들이 동맹휴학 했다.”
일제강점기 보통(초등)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 과정을 다룬 1927년 4월 19일 동아일보의 보도 내용이다. 이날뿐 아니다. 1921년부터 1928년까지 당시 초등학생들이 일으킨 동맹휴학은 342건에 달한다.
이 같은 사실은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가 최근 한국역사연구회의 계간지 ‘역사와 현실’에 실은 ‘1920년대 보통학교 학생들의 교원 배척 동맹휴학’ 논문을 통해 밝혀졌다. 이 논문은 1929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펴낸 ‘조선에서의 동맹휴교의 고찰’ 자료와 1920년대 동아일보 등에서 보도된 동맹휴학 기사 수십 건을 분석했다. 박 교수는 “단순 통계만 다루고 있는 총독부 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었던 실제 학생들의 동맹휴학 양상을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동안 일제에 저항한 학생들의 집단행동은 1926년 6·10만세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처럼 주로 중등학교 이상 학생들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논문에 따르면 1920년대 초등학생들의 동맹휴학 342건은 중등학교 이상 학생들이 일으킨 460건의 74.3%에 이른다.
초등학생들마저 집단행동에 나선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인 교사들의 학대에 가까운 훈육 방식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교사들의 인격 및 소행에 관한 불만이 53.5%(183건), 훈육 교칙에 대한 저항이 11.4%(39건)를 차지했다.
실제 당시 교원들이 학생들을 다룬 방식은 잔혹했다. 1922년 6월 17일자 동아일보에는 ‘전남 보성군 복내공립보통학교의 학교장 모리모토 엔쥬로(森本圓十郎)는 질문이 있으면 도리어 욕설을 하고, 창가 시간엔 2학년 생도(학생)의 머리를 몹시 때리고 발길로 걷어차서 교실 창밖으로 떨어뜨려 중상을 입혔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전북 김제의 한 보통학교에선 일본인 교사에게 조선역사를 가르쳐달라 하자 학생을 폭행해 동맹휴학이 발생한 경우도 있었다.(1927년 11월 16일자 동아일보)
자질 부족의 일본인 교원들이 대거 임용된 것이 비정상적인 훈육과 이로 인한 동맹휴학을 유발하는 큰 원인이 됐다는 분석이다. 조선총독부는 1919년 3·1운동 이후 ‘3면(面) 1교(校)’ 정책을 시행해 학교 수를 크게 늘렸다. 그 결과 1921년 791개였던 보통학교 수는 1928년 1544개로 2배 가까이로 늘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 교원 양성 기관인 사범학교는 경성, 대구, 평양 등 3곳에서 증원되지 않았다.
박 교수는 “당시 조선총독부는 부족한 교원을 1년짜리 단기 코스를 이수한 수준 낮은 교사들로 대거 채웠다”라며 “근대적인 학교 시스템을 도입해 식민지 조선의 교육 환경을 개선했다는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이 허구임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연구”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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