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운명의 날’ 승리한 두 사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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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텍시트’ 힘받은 오성운동 대표 베페 그릴로

이탈리아의 트럼프 “판 뒤집을 준비됐나요”

 “나는 여전히 코미디언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이탈리아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의 상징인 오성운동을 이끄는 코미디언 출신 베페 그릴로(68)는 지난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정치인으로 불리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2013년 총선에서 오성운동이 25.5% 득표율로 제1야당에 오르자 그릴로가 ‘광대’에 불과하다던 비웃음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웃음소리는 4일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가 부결되고 마테오 렌치 총리가 사임하자 완전히 멈췄다. 내년 실시되는 조기 총선에서 오성운동이 제1당이 될 것으로 점쳐지면서 기득권 타파와 이탈리아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외치던 그릴로가 정치무대의 중심으로 올라선 것이다.

 그릴로는 코미디언 시절부터 사회 풍자로 유명해졌다. 1980년대 인기 프로그램 ‘미국을 보여 주마’에서 그는 뉴욕 맨해튼 중심가의 낙후된 모습을 보여 주고 “모든 종류의 악행이 존재하는 이곳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며 이탈리아 사회를 비판했다. 1986년엔 중국을 방문 중인 사회당 출신 총리 베티노 크락시를 겨냥해 “모든 중국인이 사회주의자면 그곳 지도자들은 누구한테서 도둑질을 하는 건가”라고 TV 출연 중에 사회당의 부패를 비판하는 농담을 던졌다가 수년간 TV 출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코미디 무대를 이용한 사회 비판은 2005년 인터넷 블로그를 통한 정치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의 블로그에서 누리꾼들은 재생에너지, 경제 정의, 대기업의 만행 등 정치토론을 이어갔다. 블로그가 반향을 얻자 그릴로는 2009년 물, 교통, 개발, 인터넷 접근성, 그리고 환경을 포함한 ‘다섯 개 별’을 뜻하는 오성운동을 창당했다. 2013년 총선에서 하원 630석 중 91석, 상원 315석 중 35석을 확보해 제1야당이 됐다. 6월 지방선거에서는 로마(비르지니아 라지)와 토리노(키아라 아펜디노) 시장을 배출했다.

 10월 타계한 199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극작가 다리오 포는 사회 풍자를 기반으로 한 정치운동을 이어가는 그릴로에게 “초현실적인 기발한 생각을 사용할 줄 아는 현명한 이야기꾼”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워싱턴포스트(WP)는 “‘기득권 정치의 오물을 빼겠다’는 도널드 트럼프의 메시지와 강력한 반(反)주류 및 반부패 정서를 보이는 그릴로는 유사하다”고 보도했다. 두 사람 모두 “TV를 통해 유명해졌으며 기성 언론과 기성 정치에 적대적이고 브뤼셀, 베를린, 파리에서 모두 환영받지 못한다”는 분석이다. 그릴로는 “총리 욕심은 없다”며 정치 전면에 나서지는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 유럽 첫 극우정당 대통령 저지한 판데어벨렌

오스트리아의 오바마 “장벽없는 유럽건설 꿈”

 4일 오스트리아 대선에서 극우 자유당 노르베르트 호퍼 후보(45)를 누른 무소속 알렉산더 판데어벨렌(72)은 ‘유럽의 오바마’로 불린다. 그는 옛 소련에서 탈출한 난민의 아들이다.

 판데어벨렌은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네덜란드계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에스토니아인 어머니를 만나 에스토니아에서 결혼했다. 스탈린 통치를 받던 에스토니아를 탈출한 부모는 유럽을 떠돌다 오스트리아로 도피했다. 그 후에도 스탈린 군대를 피해 떠돌이 삶을 살아야 했다. 오스트리아 서부 티롤 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판데어벨렌은 “티롤 주에서도 떠돌이 같은 유년기를 보냈다”고 말했다.

 고향 티롤 주에 있는 인스브루크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빈대학 교수를 지낸 판데어벨렌은 1994년 의회에 입성했다. 사회민주당원이던 그는 이때 녹색당으로 옮겨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10여년간 뚝심 있게 녹색당을 지키며 대변인과 당수(黨首)를 지냈다. 녹색당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2008년 선거에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녹색당이 대패하자 탈당했다. 그러다 올해 대선에서는 자유당에 맞선 중도좌파 진영과 무소속 연대의 후보로 나왔다.

 판데어벨렌의 꿈은 국가 간 장벽이 없는 ‘진정한 유럽 통합’을 이루는 것이다. 유럽이 통합돼야 난민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보호된다고 믿는다. 오스트리아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주도하려는 호퍼와는 상극일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극우 정당 대통령을 배출하는 나라가 될 뻔했다. 4월 1차 투표에선 호퍼가 양대 정당인 국민당과 사민당 후보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호퍼와 결선에 진출한 판데어벨렌은 유세 내내 “오스트리아가 유럽에서 극우 정당 대통령을 선출하는 최초의 국가가 될 수는 없다. 호퍼의 당선은 막아야 한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결국 판데어벨렌은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내줬던 호퍼와 5월 대선 결선투표에서 겨뤄 간신히 승리했다. 하지만 호퍼의 자유당이 결선투표 부재자 투표함 일부가 참관인 없이 예정보다 일찍 개봉됐다고 주장해 투표가 무효 처리됐다. 4일 재선거에서는 호퍼가 이길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등의 이변으로 오스트리아에서도 극우 바람이 거세지고 있었다. 그러나 극우 정당 집권에 거부감을 느낀 유권자들은 판데어벨렌에게 표를 몰아줬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한기재 기자 record@donga.com
#이텍시트#그릴로#판데어벨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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