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미현]영국정치를 法 없이도 할 수 있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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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 다수당대표 총리 임명’… 법에 없어도 오랜 ‘헌법적 관습’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法 아닌 사회지도층의 의지
선거구 없는 초유의 사태… 국회는 법이라도 지키시라

이미현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법학과 교수
이미현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법학과 교수
인간이 사회적 존재가 된 것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선택한 결과다. 집단생활이 가장 효율적인 자기 보전 및 발전 수단이라는 것을 깨달은 인류가 필요에 의해 선택했다. 하지만 각자의 필요라는 것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닌지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해관계가 다른 구성원들을 느슨하게나마 하나로 묶는 끈이 필요하다. 바람직한 사회상에 대한 사회 구성원 간의 암묵적인 합의가 바로 그런 끈이며 이를 구체적으로 시행하기 위한 수단이 곧 도덕 관습 법 같은 사회규범이다. 그러니까 사회규범이란 사회가 평화롭게 지속 발전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인 것이다.

그러나 자연법칙과는 달리 사회규범은 그 존재만으로 사회질서 유지라는 결과가 당연히 수반되지는 않는다. 건강한 사회는 사회규범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일 뿐이다. 사회규범 중 특히 사회의 기본적 질서 유지에 필수적이라 강제력이 부여된 것을 우리는 법이라 부른다.

최소한의 생존권만이 확보된 상태를 행복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처럼 법만이 지켜지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일 뿐이다.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사회 구성원의 행동기준은 준법을 넘어 전반적인 사회규범의 준수가 되어야 한다. 특히 국가를 이끌어가는 정치 영역에서는 위법 여부가 아니라 사회상규 부합 여부가 논의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법원으로 가져가면 법원으로서는 법을 우선적으로 적용하여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법부의 역할인 동시에 사법부의 한계다.

의원내각제인 영국에서는 의회주권(parliamentary sovereignty)이라는 원칙하에 의회의 절대적 우위가 인정되므로 법원의 위헌법률심사는 허용되지 않는다. 입법 오류는 오로지 의회 스스로 바로잡을 수 있을 뿐이다. 같은 이유로 헌법 개정을 위해 일반 법률 개정보다 더 엄격한 요건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현재의 의회가 미래에 구성될 의회의 의회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듯 막강한 권한을 갖는 의회를 비롯하여 영국 정치를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헌법적 관습(constitutional conventions)이다. 헌법적 관습이란 국왕과 행정부 또는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관계 등에 대해 오랜 역사를 거쳐 형성된 관행이나, 명시적 또는 묵시적 합의 등에 근거한 행동규범에 불과하므로 법적 구속력이 없다. 즉 위반하더라도 아무런 법적 제재 수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적 관습은 오랜 세월 동안 상당히 충실하게 지켜져 왔다. 예를 들면 영국 민주주의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는, 국왕이 하원의 다수당 지도자를 총리로 임명하는 전통은 헌법적 관습으로만 머물다가 20세기에야 비로소 성문법규에 반영되었다. 그래도 입헌군주제가 확립된 17세기 이래 국왕이 다수당 지도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총리로 임명한 적은 없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 헌법적 관습이 이토록 충실하게 지켜져 온 이유는 오로지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적 편의성과 전통 존중의식의 요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어지간한 정치적 문제는 정치권 내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야말로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내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사실 외형만 보면 영국의 최고법원은 최근까지도 의회의 일부에 불과했다. 2009년 10월 대법원(The Supreme Court of the United Kingdom)이 독립기관으로 공식 출범하기 전까지는 최고법원의 역할은 상원의 항소위원회(The Appellate Committee of the House of Lords)가 담당했다. 항소위원회 소속 상원의원들도 법적으로는 입법권이 있는 상원의원 신분이지만 실제로 이들은 입법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재판만을 담당했다. 상원 역시 항소위원회의 업무에 전혀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사법부의 독립이 사실상 유지됐다. 그렇다고 2009년 이전의 영국이 사법부 독립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국가라고 여기는 사람도 별로 없다.

민주사회를 지켜내는 것은 법이 아니라 이를 지켜내려는 사회 구성원들, 특히 사회 지도층의 의지다. 총선이 임박했는데도 선거구가 없는 초유의 위법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이 바로 입법부인 요즈음, 정치권을 향해 그저 법이라도 지켜 달라고 호소하고 싶을 뿐이다.

이미현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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