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연욱]가치 논쟁은 더 치열하게 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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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욱 정치부장
정연욱 정치부장
박근혜 대통령이 2004년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대표 시절 탄핵 역풍을 헤쳐 나오자 곳곳에서 ‘박근혜 대통령 프로젝트’가 가동됐다. 박 대통령을 상대로 “다음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이런저런 전략이 있어야 한다”는 주문이 쏟아진 것이다. 박 대통령을 상대로 은밀하게 진행된 프레젠테이션에서 등장하는 단골 키워드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전략’이란 단어를 싫어했다. 각종 전략을 듣고 난 뒤 “앞으로 전략이란 말을 안 쓰실 거죠”라고 짧게 되물었다는 얘기가 지금도 전해진다. 박 대통령은 그런 전략을 편의에 따라 수시로 생각을 바꾸는 정치권의 정략처럼 부정적 뜻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많이 사용한 단어는 ‘약속’이다. 당 대표 시절 지역 현장을 다니면서 주민들에게 한 약속을 수첩에 꼼꼼히 정리한 뒤 참모들에게 넘겼다. 수시로 이행 실적을 평가하며 의원들을 독려했다. 일부 의원은 “정치를 왜 그렇게 어렵게 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 사이에 ‘약속’은 박 대통령의 정치적 가치로 각인됐다. 어찌됐든 약속은 박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이 된 것이다.

유승민이 8일 원내대표직을 사퇴한 기자회견에서 눈길을 끈 것은 ‘가치’란 단어다. 유승민은 “내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를 포함해 이 단어를 네 번이나 사용했다. 당의 가치가 아니라 ‘나’를 주어로 한 만큼 개인의 생각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4월 유승민이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제가 꿈꾸는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의 길로 가겠다”고 했을 때 한 여당 중진은 “야당 원내대표 연설인 줄 알았다”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유승민 기자회견 내용을 놓고 친박계 인사들은 “원내대표의 직분을 망각한 ‘자기 정치’의 전형”이라고 발끈했다.

흔히들 “당청은 한 몸”이라고 한다. 청와대와 여당이 유기적으로 잘 협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국정 성과를 낼 수 있고, 이를 토대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식은 다를 수 있다. 청와대의 고민도 있겠지만 당은 직접 민심과 마주하는 모세혈관 같아서 더 예민할 수밖에 없다. 당청 관계가 종종 삐걱거리는 이유다. 당청 관계에서 견제와 협조는 새의 두 날개처럼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지난해부터 당내 각종 경선에서 친박계가 연전연패한 것은 이 같은 큰 흐름을 못 읽은 탓이었다.

아직도 인물 중심의 리더십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당을 떠나라”라고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 먼저 얼굴을 맞대고 치열하게 가치 논쟁부터 했는지 묻고 싶다. 당의 방향을 놓고 한다면 노선 투쟁이 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여권은 서로 막연한 ‘인상 비평’에 기대어 흥분부터 한 것이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 전에 복지 확대를 포함한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도적으로 제기했다. 경제성장 담론에 젖어 있던 당내에선 적잖은 반발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경제 민주화 이슈가 공론화되면서 야권의 복지 공세는 무력화됐다. 당내에서 치열한 가치 논쟁을 벌이면 역설적으로 그 가치는 그 당이 선점하게 된다. 김무성이 13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포용적 보수’ ‘서민적 보수’ ‘도덕적 보수’ ‘책임지는 보수’ 등 4대 보수론을 제기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여권은 가치 논쟁을 쉬쉬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공론화해야 한다. 박 대통령도 치열한 논쟁의 불길 속에서 담론을 벼릴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승민 사태 13일은 여권에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정연욱 정치부장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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