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유승민 내친 박 대통령과 여당, 위기는 시작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9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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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지난달 25일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의 정치’로 질타당한 지 13일 만인 어제 사퇴했다. 그는 김무성 대표로부터 ‘원내대표직 사퇴 권고’라는 의원총회 결과를 통보받고 기자회견을 통해 “의원총회의 뜻을 받들어 물러난다”고 밝혔다. “평소 같으면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던지지 않은 것은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며 법과 원칙, 정의를 꼽았고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도 했다. 박 대통령이 여당 의원들을 동원해 자신의 사퇴를 압박한 행위는 비민주적이며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일침을 놓은 셈이다.

그가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 진영을 넘어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를 하겠다”고 말한 것은 새누리당이 좀 더 가운데로, ‘개혁적 보수’로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는 신념의 표현일 것이다. 유 원내대표는 4월 첫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도 “가진 자, 기득권 세력, 재벌 대기업의 편이 아니라, 고통받는 서민·중산층의 편에 서겠다”고 당론 수렴 없는 개인적 견해를 밝혀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새누리당의 노선에 대해서는 박 대통령 지지층이나 보수 성향의 국민 사이에서도 견해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원내대표가 당의 색깔을 바꾸거나 ‘자기 정치’를 하는 자리는 아니다.

사퇴의 변에서 그가 여당의 원내대표로서 대통령의 거부권을 불러온 국회법 개정안 처리 잘못을 자성하지 않은 점도 납득하기 어렵다. ‘맹탕 개혁’으로 지적되는 공무원연금 개정안 협상에서 유 원내대표가 야당에 끌려다니다가 ‘입법 독재’에 악용될 수도 있는 국회법 개정안에 합의한 책임이 가볍지 않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당과 청와대의 내부 의견 조율을 충실히 못한 잘못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160명의 새누리당 의원이 선출한 원내대표가 대통령의 비난을 받고 사실상 경질된 사태는 정당민주주의와 3권분립 원칙에 어긋나는 나쁜 선례로 남게 됐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새누리당이 유 원내대표를 사퇴시키려면 최소한 의원 투표라도 거쳤어야 했다. 박 대통령이 ‘자기 정치’를 한 정치인으로 유 원내대표를 찍은 직후부터 새누리당과 김무성 대표는 신뢰할 만한 집권여당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꼭 1년 전 박 대통령에게 ‘독선에 빠진 기미’를 지적하면서 ‘당청 수평관계’를 내걸어 새누리당의 새 리더로 당선된 사람이 김 대표다. 대등한 당청 관계를 다짐했던 최고위원들까지 청와대의 하부기관을 자임한 상황이니 앞으로 “할 말은 하겠다”고 나설 사람이 누가 있을지 의문이다.

여당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며 함께 정권의 성공을 만들어가야 할 결사체다. 그렇다고 대통령의 비위나 맞추는 것을 여당의 소임이라 할 수는 없다. 헌법상 국회의원은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고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할’ 의무가 있다(46조 2항). 새누리당이 국리민복이나 민심과 어긋난 박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하지 못하고 오직 대통령의 의중만 대변하려 할 경우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유 원내대표의 사퇴에 대해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의원들의 총의로 결정된 일”이라면서 “당청 관계는 앞으로 잘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의 ‘6·25 폭탄 발언’으로 시작된 여권 내부의 분란에 대해 국민 앞에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당시 정부의 메르스 초동 대처 미비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를 기대한 국민도 적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정치권을 거칠게 비판함으로써 순식간에 ‘메르스 정국’을 ‘유승민 정국’으로 뒤바꾸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마침내 유 원내대표가 사퇴까지 했으니 박 대통령이 국민과의 소통, 정치권과의 대화는커녕 더 폐쇄적으로 돌아서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번 일이 유 원내대표의 사퇴로 마무리됐다고 해서 박 대통령의 승리라고 하기는 어렵다. 청와대든 여당이든 누구도 쓴소리를 하지 못해 대통령이 불통과 독선의 정치로 내달린다면 이번 사태는 새로운 위기의 시작이 될 우려가 크다. 내년 총선 공천을 놓고 친박과 비박 간, 청와대와 당 사이의 갈등이 더욱 커지면 민생과 국정개혁 과제는 뒷전으로 밀릴 가능성도 있다.

다음 달이면 임기 절반을 돌아서는 박근혜 정부의 능력과 개혁성, 도덕성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한 국민이 적지 않다. 예스맨으로 가득한 청와대와 여당으로는 자칫 무능한 정부, 성과 없는 대통령으로 끝날 수 있다고 국민이 되레 걱정을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귀를 열고 당청 관계 정상화를 비롯해 소통의 정치를 강화해야 한다. 그것이 유승민 사태로 불거진 당과 국정의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드는 길이다.
#유승민 사퇴#박근혜 대통령#새누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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