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영식]‘완벽한 의견 일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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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정치부 차장
김영식 정치부 차장
외교부에 출입하던 시절 당국자들로부터 자주 듣던 말이 있었다. “한국과 미국의 의견은 일치했다.” “한미는 찰떡공조를 하고 있다.” 북한 문제나 동북아시아 현안과 관련한 한미 양국 간 고위급 회담 전후로 듣던 말이다. 한미 간 협의가 성공적일 때나, 양국 관계가 비난받을 때도 모두 사용됐다.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라는 책을 접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이런 자화자찬이 슬슬 지겨워지던 무렵이었다. 가장 눈길을 끈 대목은 닭, 소, 풀이 각각 그려진 그림 3장이었다. 3개 중 2개를 연결해 묶으라고 하면 동양 어린이 대부분은 소와 풀을 선택했다. 서양 어린이 대부분은 닭과 소를 선택했다고 한다.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과, 동물이라는 범주로 접근하는 서양의 차이를 실험으로 보여준 셈이다. 세상을 대하는 동서양 사고방식의 차이를 보면서 한미 의견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던 당국자의 발언을 다시 새겨보게 됐다.

예전 일을 떠올린 건 미국 국무부 3인자인 웬디 셔먼 정무차관이 지난달 27일 공개 세미나에서 던진 언급의 파장과 이에 대한 한미 양국의 대처법을 접하면서다. “민족 감정은 악용하기 쉽고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공격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받기란 어렵지 않다”는 셔먼의 언급이 논란이 되자 양국은 서둘러 봉합에 나섰다. 마리 하프 미 국무부 부대변인은 “미국 정책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에 대해 한미가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고 말했다. ‘입장 공유’라는 포괄적 언급은 정부의 접근 방식이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음을 보여준다. 피해자인 한국을 겨냥한 발언의 적절성 문제도 있지만 과연 미 정부 움직임의 이면을 한국 정부가 제대로 짚고 있는 것인지 걱정하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2년도 남지 않은 임기 안에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미국은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는 중국의 ‘신형대국관계’에 맞서 아시아의 신질서를 확립하고, 한국과 일본에 적절한 역할을 맡기려 한다. 하지만 한일관계 악화로 차질을 빚자 조바심을 내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셔먼이 한일 과거사 문제를 서둘러 봉합하려는 속내를 비친 셈이다. 한일 양국의 관계를 고려하는 대신 중국과 다른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 국가’라는 범주에 포함시킨 기능적인 접근법이기도 하다.

국제사회에서 중요하게 고려되는 요인 중 하나가 국가의 전략적 가치다. 미국이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일본보다 낮게 평가한다면 셔먼 차관 같은 발언은 계속 이어질 수 있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런 미국의 태도가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일탈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일본 외무성이 최근 홈페이지의 한국 소개란에서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한다’는 표현을 삭제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미국이 뒤에 있으니 이제 한국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이웨이를 고집하겠다는 태도마저 느껴진다.

오늘날 일본이 과거사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 배경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도쿄전범재판에서 전범에 포함됐던 일왕에게 면죄부를 준 미국의 책임도 있다. 올해는 종전(終戰) 및 광복 70주년,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는 해다. 과거사의 잘못을 바로잡을 좋은 기회다. 하지만 미국의 어설픈 봉합 시도는 또다시 잘못된 70년을 만들 수도 있다. 한국 정부도 국제질서 변화기에 미국 일본 등 주변국들이 공감할 비전을 담은 대전략을 제시하는 적극적인 대처에 나서야 한다. ‘완벽한 의견 일치’ 허상에 안주해선 안 된다.

김영식 정치부 차장 spear@donga.com
#사고방식#의견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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