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현진]죄악세를 위한 변명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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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진 소비자경제부 차장
박현진 소비자경제부 차장
‘과거로 돌아가 특정 인물을 지울 수 있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느냐’는 흥미로운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여러 인물이 스쳐갔지만 대학시절 ‘절친’ 중 한 명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 친구 때문에 담배를 처음 배웠다. 질문을 받았을 때는 수차례 금연을 시도했다 좌절의 쓴맛을 봐야 했던 시기였다. 금연에 실패한 것이 의지 부족일 텐데 애꿎게 친구 탓으로 돌리며 원망할 정도로 담배의 중독성은 강했다.

최근 담뱃값 2000원 인상 계획을 두고 말들이 많다. 흡연자들을 쥐어짜 세수(稅收)를 확충하려 한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여야의 공방이 뜨거운 것도 담뱃값 인상이 서민에게 더 많은 부담을 지우는 ‘서민 증세(增稅)’라는 비판 때문이다. 이런 논란은 2004년 마지막 인상 이후 10년간 담뱃값 인상이 검토될 때마다 불거졌다. 값이 올라도 흡연율은 줄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단골 메뉴였다. 담배회사의 로비도 빠지지 않았다.

10년 동안 논란이 ‘귀찮아서’ 정부가 인상 카드를 접을 때마다 ‘이참에 끊어봐’라는 생각을 가졌던 일부 흡연자는 다시 담배를 물곤 했다. 같은 시기 해외 국가들은 금연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몇 달 전까지 뉴욕에 있을 때 담배 한 갑의 가격이 12∼14달러(약 1만2500∼1만4500원)였다. 개비당 600원이 넘다 보니 담배를 멀리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담뱃값 인상 등 강력한 금연정책을 펴 온 뉴욕 시의 성인 흡연율은 2001년 21.5%에서 2011년 14.8%로 줄었다. 반면 한국 성인 남성의 흡연율은 지난해 기준 42.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두 번째로 높다. 담뱃값은 2012년 기준으로 OECD 국가 가운데 22위로 낮다. 상반된 성적표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담뱃값을 동결한 영향도 크다.

한국은 담배뿐만 아니라 술에도 관대하다. 전국 어디를 가든 24시간 내내 편의점에서 모든 종류의 술을 구입할 수 있다. 음식점과 주점에서 술을 파는 시간을 제한한다는 발상은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미국 뉴저지 주의 경우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오후 8∼9시가 넘으면 아예 술을 살 수 없다. 밤늦게 찾아온 손님을 위해 술을 사려고 ‘술 판매 전문매장(리커숍)’과 편의점을 전전하다 허탕 친 기억이 또렷하다. 상당수의 식당들은 자신이 직접 술을 가져와야 하는 ‘BYO(Bring Your Own Bottle)’ 원칙을 갖고 있다. 이마저도 독주는 반입이 어려우며 도수가 낮은 맥주 정도가 가능하다. 반면 술에 대한 느슨한 규제로 한국의 음주량 순위는 세계에서 압도적인 상위권이다.

정부는 담뱃세에 이어 주세(酒稅) 인상도 만지작거리고 있다. 19일 기획재정부가 마련한 ‘중장기 조세정책 운용계획’에서 개별소비세를 합리적으로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술과 담배 등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물품에 물리는 세금인 ‘죄악세(罪惡稅·Sin Tax)’는 대표적인 개별소비세다.

‘서민 친화적인 정책’과 ‘증세’라는 프레임에 갇혀 마냥 죄악세를 경원시한다면 음주량과 흡연율 세계 수위 국가의 굴레를 벗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정부는 죄악세 명목으로 거둬들인 세금에 대해서는 국민건강 증진 등 최대한 부과 목적에 맞춰 지출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자칫 ‘증세를 위한 꼼수’였다는 역풍을 맞아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박현진 소비자경제부 차장 witness@donga.com
#담뱃값#주세#세금#금연#죄악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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