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교포의 딸, 정치범수용소 악몽 딛고 사장님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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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코리아 프로젝트 2년차/준비해야 하나 된다]
[탈북자에서 한국인으로]<5>인형공장 차린 강유진씨

강유진 신원아트인형 사장이 26일 오후 서울 구로구 자신의 공장에서 만든 곰 인형을 승합차 보조운전자석에 앉혀서 옮기고 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있다가 2006년 탈북한 강 사장은 이제 어엿한 기업인이다. 그는 “한국엔 아직 탈북자와 남한 사람 간 이질감이 존재한다”며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강유진 신원아트인형 사장이 26일 오후 서울 구로구 자신의 공장에서 만든 곰 인형을 승합차 보조운전자석에 앉혀서 옮기고 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있다가 2006년 탈북한 강 사장은 이제 어엿한 기업인이다. 그는 “한국엔 아직 탈북자와 남한 사람 간 이질감이 존재한다”며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2006년 7월 무더웠던 여름. 중국 베이징 인근 시골의 한 식당 앞에 택시 한 대가 시동을 켠 채 서 있었다. 6개월 전 목숨을 걸고 북한 두만강을 건너 온 강유진 씨(당시 37세)에게는 이 택시가 ‘망망대해에서 생명을 구해 줄 구조선’이었다. 강 씨는 탈북하자마자 브로커의 손에 이끌려 허베이(河北) 지역 시골로 갔고, 한 중국동포 식당에서 식모살이를 해야 했다. 강 씨의 사정을 알게 된 한 손님이 강 씨를 탈출시켜 주려고 택시를 대기시킨 것이었다.

식당 주인이 한눈을 파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택시에 몸을 던졌다. 자신을 도와준 그 손님의 소개로 3개월 뒤 칭다오(靑島)에 있는 인형공장에 취직했다.

그랬던 강 씨가 지금은 한국에서 인형제조업체인 신원아트인형의 ‘사장님’이다.

○ 지옥을 넘어 한국에 오다

강 씨는 재일동포였던 아버지의 1남 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강 씨의 아버지는 1960년대 북한의 체제 선전에 설득당해 귀국선인 만경봉호에 몸을 실었다. 돈벌이가 괜찮았던 자동차 부품공장을 포기하고 북한에 갔지만 현실은 암담했다. 북한에 대한 아버지의 비판이 나날이 늘어갔다.

1976년 어느 날. 새벽에 들이닥친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에 의해 강 씨 가족은 함경남도 지역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아버지의 북한체제 비난 때문이었다. 수용소 안에서도 아버지는 따로 격리됐다. 그렇게 8년을 살았다.

“수용소에서 나가는 날에야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었어요. 그렇게 기골 좋으셨던 분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서…. 아버지는 가족 중 가장 성격이 활달했던 저에게 ‘너만은 살아서 북한의 현실을 알려야 한다’며 탈북을 권유하셨어요.”

탈북 기회만 노리고 있던 강 씨는 2006년 1월에야 아버지가 손에 쥐여준 일본돈 2만 엔을 옷 속에 꼭꼭 숨기고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중국어도 몰랐던 강 씨는 중국 땅에서도 온갖 고초와 우여곡절을 겪었다.

칭다오에 있는 한국 회사(인형공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나마 인간다운 삶이 시작됐다. 강 씨는 제일 일찍 출근해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인형에 단추 하나 다는 일도 꼼꼼히 배웠다. 한국인 사장의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중요한 중국 내 출장이 있으면 강 씨가 동행했다.

“그 공장에서 모은 돈으로 한국행을 시도했어요. 2008년 8월 드디어 한국 땅을 밟았을 때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 ‘내국인’ 입국심사를 받으며 쏟아진 눈물

6개월 정착 교육을 마치고 세상에 나왔지만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북한에서 체육교사를 했던 경력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기술이 필요했다. 강 씨는 ‘한국에서 내가 직접 인형을 만들어 보자’고 결심했다. 2009년 3월 ‘하나토이’란 이름의 인형업체 법인을 설립했다.

어떻게 사업을 해야 할지 몰랐던 그는 칭다오에서 도움을 받았던 한국인 사장을 찾아갔다. 사연을 듣자 발 벗고 도와주겠다고 했다. 주문 물량이 늘기 시작했다. 2011년엔 여수엑스포 마스코트 인형 50만 개 주문도 따냈다. 납품 일자를 맞추기 위해 중국 업체에 하청을 줘야 하는 경우도 잦아졌다.

“첫 중국 출장을 갔다가 한국에 들어오는데 공항 직원이 제 초록색 한국 여권을 보더니 내국인 입국심사 줄에 서라고 했어요. 저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화장실에 들어가 울었습니다.”

모든 사업이 그렇듯, 강 씨의 인형공장도 늘 잘되는 건 아니었다. 불황으로 하나토이를 접고 다른 인형공장에 취직해 다시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그땐 탈북자라는 주위의 편견에 맘고생이 더 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신원아트인형’으로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강 사장은 지난해 11월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도움으로 현대자동차에서 영세업자의 자립을 돕는 ‘기프트카 캠페인’의 대상자로 뽑혔다. 기증받은 승합차(그랜드 스타렉스)로 직접 주문받은 인형 배달도 하고 있다. 강 씨는 “힘들어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일하다 보니 주위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새로운 도전도 준비 중이다. 지난해 금천구청에서 사회적기업 학교를 수료했다. 그는 “탈북자들을 채용해 개성공단에서 나오는 납품 불량 옷의 원단 등을 원료업체에 판매하는 사회적기업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 “기부재단 설립해 어려운 사람 돕고 싶어요”


정부가 지원해준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강 씨는 이달 24일 보금자리주택에 당첨돼 올해 12월 이사를 간다. 지난 60개월간 꼬박꼬박 20만 원씩 청약통장에 돈을 모은 결실을 이룬 것이다.

그는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사업이 더 번창하게 되면 기부재단을 만들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다. 나 같은 탈북자도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강 씨는 통일을 위해 소통이 가장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탈북자와 한국 사람 사이의 이질감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와 민간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탈북자#통일#신원아트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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