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들의 화려한 변신

동아일보 입력 2014-03-11 03:00수정 2014-03-11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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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 ▶▶▶ 잡지 ‘빅이슈’ 팔며 노숙생활 청산한 심재명-구영훈-서명진씨 모델 되다 ▶▶▶ after
한때 노숙 생활을 했지만 잡지 판매원으로 재기한 심재명, 구영훈, 서명진 씨(왼쪽부터). 무표정했던 이들이 메이크업과 디자이너 의상으로 자신감을 더해 밴드 ‘봄날’ 멤버로서 카리스마를 뽐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5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스튜디오. 화보 촬영 준비가 한창이었다. 패션 디렉터는 의상을 손질하고, 포토그래퍼는 조명을 맞추느라 분주했다. 이윽고 등장한 모델들. 덥수룩한 머리에 후줄근한 차림이 범상치 않았다.

이들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3년 전까지만 해도 노숙 생활을 했다. 서울의 지하철 역사에서 생활하던 구영훈(48), 서명진(42), 심재명 씨(56)가 카메라 앞에 섰다. 플래시가 펑펑 터지는 무대. 그들이 무언의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우리 노숙했어요.’

대중문화잡지 ‘빅이슈’에 실릴 사진을 찍기 위한 촬영. 빅이슈는 노숙인들을 잡지 판매원으로 고용해 자립을 돕는 사회적 기업이다. 이날 작업도 외모 변신으로 노숙인들의 자존감 회복을 돕고 사회적 인식도 개선해 보겠다는 취지로 마련됐다.

‘변신 전’ 사진을 찍고 난 후 난생처음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았다.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귀까지 빨개진 얼굴로 구 씨가 쑥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이제 미래가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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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씨의 지난 15년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비닐 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를 도와 20대를 걱정 없이 보냈다. 하지만 외환위기와 함께 가시밭길을 걸었다. 물려받을 줄 알았던 공장이 문을 닫았고, 그의 호구책도 막혔다. 형편이 어려워지니 가족과의 불화도 깊어졌다. 홀로 집을 나와 새 직장을 찾아다녔지만 특별한 기술도 없던 그에게 취업은 언감생심. 고시원을 전전했고 건설 일용직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다.

그러던 2008년 어느 날 밤 오토바이가 그를 치고 달아났다. 바닥을 구르면서 앞니가 모두 부러졌다. 치아를 잃고 나자 말까지 어눌해졌다. 의사소통이 어려워지면서 그나마 공사장에서도 쫓겨났고, 고시원 쪽방에서도 쫓겨났다. 그렇게 을지로입구역 지하도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자존심은 버리지 못해 무료 급식소에는 발길도 하지 않았다. 배를 곯기 일쑤였다.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간절히 바라던 차에 판매원을 찾아 나선 빅이슈와 연을 맺었다.

2011년 9월, 구 씨는 빅이슈 판매원으로 지하철 역사에 섰다. 노숙을 하던 지하철역이 일터가 됐다. 행인들에게 “안녕하세요”라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그가 이제는 하루에 잡지 서른 부를 거뜬히 파는 베테랑 영업맨이 됐다. 5000원짜리 잡지 한 부를 팔면 2500원이 남으니 벌이도 나쁘지 않다.

“멋있네요.” 메이크업이 완성되자 그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매끈해진 피부와 정돈된 헤어스타일이 그의 자신감을 끌어올린 듯했다.

서 씨와 심 씨도 시간이 지날수록 촬영을 즐겼다. 화려한 조명을 피해 한쪽 구석 소파에 몸을 구겨 앉아 있던 이들이 자연스럽게 무대 중앙을 오갔다. 변신 뒤 서 씨는 귀여운 매력을 뽐냈고, 검은 가죽 재킷의 심 씨는 카리스마를 드러냈다. 철없는 캥거루족으로 살던 서 씨와 외환위기로 타격을 입은 심 씨 모두 각자의 사연으로 거리에 나왔지만 “노숙 생활이 도리어 약이 됐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정신을 차렸단다.

서 씨는 판매원으로 나선 첫날을 잊지 못한다. ‘누가 쳐다봐주기나 할까’ 싶어 고개 숙인 그에게 여고생이 다가와 “힘내세요”라며 생긋 웃어준 그날. 시험 삼아 들고 나선 잡지 열 부 중 여덟 부를 팔았다. “노숙을 하면서 사기도 당하고 죽을 고비도 넘기고 별일 다 겪었지만, 결국 사람들이 제게 희망을 줬어요.” 자립을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그는 거리에서 고시원으로 잠자리를 옮겼고, 곧 임대주택에 입주할 계획이다.

이들은 판매원으로 맺은 인연으로 ‘봄날’이라는 밴드도 만들었다. 음악가들의 도움을 받아 악기 연습을 하고 창작곡도 준비해 공연을 앞두고 있다. ‘기대, 두려운 희망,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다가가네.’ 그들이 공동작사한 ‘쪽방의 봄날’이라는 가사처럼 그들이 희망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카메라 셔터 소리도 경쾌하게 울렸다. 찰칵.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노숙인#빅이슈#심재명#구영훈#서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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